항목 ID | GC042007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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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蓬萊券番 |
영어의미역 | Bongrae Gisaeng Call-offic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525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선애 |
[정의]
1922년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에서 설립된 기생 조합.
[설립 목적]
봉래권번은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과 초량 일대에 객주업이 성행하자 이를 대상으로 영업하기 위해, 대한제국 시절 동래부에서 군관향수를 지낸 영주동 출신 조씨가 설립하였다.
[변천]
봉래권번은 원래 1915년경 영주동과 초량에서 출발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과거에 대구의 경상 감영과 동래부 관기 출신이 많았다. 그런데 1920년대 들어 일본의 수산업자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영주동과 초량 일대의 객주업이 쇠퇴하자, 1922년 12월경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52번지로 장소를 옮겼다. 1938년과 1940년에 임월선 조합장과 조합원인 기생들 사이에 분규가 일어나 어려움을 겪었지만, 몇 차례에 걸쳐 조합장이 바뀌면서 사태를 수습하였다. 봉래권번은 소속 기생들이 일본 요정에 드나들고, 중구 지역에 사는 상류층 일본인에게 알려지면서 번창하게 되었다.
1940년 평양과 서울의 기생들이 부산에 와서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579번지에 초량권번[초대 조합장 정재익]을 설립하고, 초량의 요릿집인 봉래각에 드나들었다. 이때 봉래권번 기생의 장기는 국악 가락이었고, 초량권번 기생의 장기는 그 시절의 유행가였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인 1944년 3월 12일 전국 예기(藝妓) 영업 폐지령이 공포되면서 봉래권번은 문을 닫게 되었다.
1945년 광복 직후 정재익이 초량권번을 재건하자, 봉래권번도 다시 설립되었다. 이후 두 권번이 잦은 대립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한데 뭉쳐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58번지에서 새로운 기생 조합을 꾸렸다. 하지만 이후 요정마다 전속 기생을 두는 등 변화된 유흥 양식으로 인하여 통합된 기생 조합은 사라지고 말았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의 영선관[1925년], 영춘관[1936년] 등 한국 요릿집과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의 봉래각[1933년], 흥안각[1938년] 같은 중국 요릿집으로 출장을 가서 기악과 노래, 춤으로 여흥을 돋우었다. 평소에는 노래[창]와 춤을 가르치는 강사를 초빙해 신임 기생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쳤다. 기생으로서 지켜야할 예의범절도 엄격히 가르쳤으며, 일정 기간 수업을 마친 기생은 매일 오후 5시에 권번 사무실로 나와 대기하였다가 요릿집에서 요청이 오면 응하였다.
기생들은 시간당 화대를 받았는데, 첫 1시간은 1원 50전이고 이후에는 시간당 1원씩을 더 받았다. 그 중 요릿집에서 수수료 1할을 챙겼고, 조합비로 조금씩 떼었다고 한다. 매춘 행위는 원칙적으로 못하게 되어 있었지만, 매춘 행위를 하는 기생도 있어 경찰 단속에 걸리는 경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