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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면 3·1 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719
한자 鳴旨面三-一運動
영어의미역 March 1st Movement at Myeongji-mye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건
관련인물/단체 이진석|양왕석|김영두|이규회|지봉구|박두성|정소목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4월 10일연표보기 - 명호 장터에서 독립 만세 시위
종결 시기/일시 1919년 4월 11일연표보기 - 진목리에서 독립 만세 시위
발단 시기/일시 1919년 4월 - 이진석이 경성약학전문학교 학생 김연복에게서 독립선언서 입수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9일 - 이진석 등이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 제작
발생|시작 장소 명호 장터 -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1377 일대지도보기
종결 장소 진목리 -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정의]

1919년 4월 10~11일 양일간 명지면 일대에서 일어난 3·1 운동.

[역사적 배경]

서울에서 시작된 3·1 독립 만세 시위 소식이 전해지고, 사립동명학교 교사 이진석(李鎭奭)이 동창인 김연복(金淵輻)[경성약학전문학교 학생]의 연락으로 독립 선언서를 입수하면서 명지면 3·1 운동의 계획이 진행되었다.

[경과]

이진석은 동창생 양왕석(梁旺錫), 김영두(金榮斗), 이규회(李圭恢), 지봉구(池鳳九) 등과 의거를 계획하였다. 시위 일자를 명호 시장 장날인 4월 10일로 결정하고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4월 9일 밤 이진석은 양왕석과 철야 작업으로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 선언서를 복사하였다. 4월 10일 이진석은 동지들과 동명학교 학생들을 중리의 명호 시장으로 비밀리에 부르고 장꾼이 많이 모인 오후 2시 경에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이진석이 태극기를 장대에 높이 달고 독립 만세를 선창하자, 약 200명[일본 측 기록 50명~60명]의 군중이 일제히 호응하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일군 헌병들이 출동하여 총검으로 군중을 해산시키자 주도 인물은 재기를 위해 피신하였다. 4월 11일 오후 10시 양왕석, 이규회, 박두성(朴斗成), 정소목(鄭小穆)은 약 50명[일본 측 기록 약 30명]의 학생, 동민을 동원하여 진목리에서 다시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결과]

4월 10일, 11일 시위는 일본 헌병의 탄압으로 해산되었으며, 이후 주도 인물의 검거가 시작되었다. 이 1, 2차 의거로 주도 인물 이진석, 김영두, 양왕석, 이규회, 박두성, 정소목, 지봉구 7명은 전원 검거되어, 각각 6월~2년의 징역형을 받아 부산감옥소와 대구감옥소에 투옥되었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명지면은 김해군에 속해 있었다. 명지면 3·1 운동은 사립동명학교 교사와 동창생, 학생들이 중심이 되고 장꾼과 명지면민이 함께 일제에 항거한 의거이다. 이 사건은 김해 장유면 3·1 운동으로 이어졌고 1920년대 김해 지역 사회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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