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7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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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榮斗 |
영어음역 | Gim Yeongd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중리 마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경숙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영두(金榮斗)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의 중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을 때 중리 마을에서도 동명학교(東鳴學校) 교사 이진석(李鎭奭)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가 추진되었다. 이진석이 경성약학전문학교 학생인 김연복에게 독립 선언서를 받아 동지를 규합하고 있을 때 김영두·양왕석·이규희·지봉구(池鳳九) 등이 합류하여 4월 10일에 만세 시위를 거행하기로 결의하였다.
중리 마을의 명호 장날인 4월 10일 오후 2시경 이진석과 양왕석은 미리 만들어 둔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학생과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태극기를 장대에 높이 달아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뒤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시위는 헌병들의 총칼 앞에서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으며 주동자들은 재기를 노리고 재빨리 숨었다.
다음날인 4월 11일 오후 10시경 양왕석·이규희·박두성·정소목 등은 약 50명[일본군 기록에는 약 30명]의 학생과 농민을 동원하여 진목(眞木)에서 다시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시위대는 일본 헌병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으며, 김영두도 두 차례 시위의 주동자로 검거되었다. 김영두는 1919년 6월 1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