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6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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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溶軾 |
영어음역 | Bak Yongsik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창욱 |
[정의]
1940년대 말 부산광역시에서 활동한 음악가.
[활동 사항]
박용식(朴溶軾)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부산에서 음악 활동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6·25 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행방불명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행적에 관해서는 당시 몇몇 일간지를 통해서 부분적으로 살필 수 있을 따름이다. 박용식은 1918년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940년대를 전후하여 일본에 유학하여, 음악 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용식은 작곡가로서 지명도가 높았고, 피아노 연주 실력도 뛰어났다. 1947년 6월 부산에서 음악회를 직접 주재하였다. 이에 대해 음악 평론가 유신(劉信)은 “박용식 의 작품은 그 화성 처리나 선율 구성 등의 기법에 있어서 능숙한 편이었으며 피아노 연주 역량도 있어, 김점덕(金點德) 독창회의 반주를 맡은 바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1948년 11월 28일에 박용식은 동광국민학교 강당에서 열린 바리톤 김점덕 독창회의 반주를 맡았다. 독창회의 테마는 ‘슈-벨트 가곡과 조선 가곡의 낮’이었다. 여기에는 슈베르트의 예술 가곡을 비롯해서 김순남·이건우 등의 한국 작곡가의 작품도 소개되었고, 박용식의 자작곡인 「자장가」[김정한 작사]와 「초혼(招魂)」[장강 작사]도 불려졌다.
1940년대 말에 박용식은 김점덕과 함께 부산음악학원 혹은 부산음악학교를 설립 운영하였다. 『부산 일보』 1948년 2월 20일자에는 “부산음악학원 학생 제군에게 고함. 2월 20일 하오 6시부터 개학하오니 학생 제군은 필히 등교함을 요함. 1948년 2월 16일 부산음악학원장 백.”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1949년 7월 13일자 『부산 일보』 광고에는 전공은 성악·피아노·바이올린·작곡 그리고 성악으로 분류되어 있었고, 작곡 전공 교사는 박용식과 김점덕이 맡은 것으로 나와 있다. 박용식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후 행방불명되었는데,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되어 희생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