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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684
한자 朴亨龍
영어음역 Bak Hyeongryong
분야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이상규 1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목사|신학자
성별
대표경력 고려신학교 교장
출생 시기/일시 1897년 3월 28일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31년 4월 - 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의 전임 교수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2년 - 만주 동북신학원 교수 및 교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7년~1948년 - 부산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48년 - 장로교신학교 교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52년~1972년 - 총회신학교 교장으로 재직
몰년 시기/일시 1978년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평안북도
학교|수학지 프린스톤신학교 - 미국
학교|수학지 남침례교신학교 - 미국
활동지 숭실전문학교 - 평양직할시
활동지 평양신학교 - 평양직할시
활동지 동북신학원 - 중국 만주
활동지 고려신학교 - 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 34지도보기

[정의]

부산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재직한, 한국을 대표하는 보수주의 신학자이자 교회 지도자.

[활동 사항]

박형룡(朴亨龍)[1897~1978]은 1897년 3월 28일에 평안북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교식 서당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박형룡은 김익두(金益斗)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입신하였고, 최봉석(崔鳳錫)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미국 프린스톤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찰스 하지(Charlse Hodge),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윌슨, 그리고 메이첸(G. Machen)으로 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변증학을 공부한 박형룡은 미국 루이스빌에 있는 남침례교신학교[Southern Baptist Seminary]에서 공부하고 1927년 7월 귀국하였다. 평양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일하는 한편,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신학에서 가르치다가 1931년 4월부터 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의 전임 교수가 되었다. 이때부터 1938년까지 교수로 있었고, 1942년에는 만주 동북신학원 교수 및 교장이 되었다.

1947년에는 부산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으나, 설립자인 한상동(韓尙東) 목사와의 견해차로 6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그 후 1948년에는 남산의 장로교신학교 교장으로, 1952년 이래로는 총회신학교 교장으로 1972년까지 활동하고 은퇴하였다. 박형룡은 1931년부터 1972년까지 약 40년간 한국과 만주에서 ‘교회의 교사(doctor ecclesiae)’로 활동하였다.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교리 신학자로서 한국 교회사와 신학의 중심에서 활동해 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978년 세상을 떠났다.

[사상과 저술]

박형룡은 선교사들의 뒤를 이어 한국인 신학자들에 의해 신학 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이래 한국 장로교의 첫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박형룡은 일반적으로 보수주의 신학자, 혹은 근본주의적 신학자로 불렸다. 스스로도 ‘근본주의자’로 인식하였으나, 이는 반문화적인 부정적인 의미의 근본주의가 아니라, 정통주의 혹은 정통 기독교를 의미하며, 자신의 신학을 자유주의적이 아닌 정통 신학으로 이해하였다. 박형룡은 처음부터 분리주의적이거나 반문화적이었던 것은 아니며, 김재준(金在俊)과의 대립과 대결을 거치면서 부정적인 의미에서 근본주의적인 성향이 심화되었던 것이다.

박형룡의 첫 저술은 『신학 난제 선평(神學難題選評)』[1935]인데, 이것은 한국인에 의해 저술된 최초의 조직신학 저술론으로, 총 18장 847면에 달하는 대작이다. 그 외에도 성경 주석의 편찬, 로라인 뵈트너(L. Boether)의 『개혁주의 예정론』을 역간하였는데, 이것은 그간의 신학교 강의와 신학 논쟁의 와중에서 나온 것이었다. 박형룡이 남긴 18권으로 구성된 『박형룡 저작 전집』은 그의 대표적인 저술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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