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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661
한자 宋惠秀
영어음역 Song Hyesu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영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화가
성별
대표경력 송혜수미술연구소 대표
출생 시기/일시 1913년 8월 13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38~1943년 - 동경 제국미술대학 유화과 수학
활동 시기/일시 1938년 - 재동경미술협회·백우회 회원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1년 - 제11회 독립전에 입선
활동 시기/일시 1941년 - 제4회 재동경 미술 협회전 출품
활동 시기/일시 1942년 - 제6회 자유전에 2점 입선
활동 시기/일시 1943년 - 제7회 자유전에 6점 입선
활동 시기/일시 1943년 - 자유전에서 본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50년 - 미술협회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51년 - 국방부 정훈국 종국 화가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51년 - 장욱진·한묵과 종군 스케치 3인전 개최, 현역 작가 초대전·중앙공보관 개관 기념 한국 현대 대표 작가 초대전에 출품
활동 시기/일시 1959년 - 양달석·조동벽과 독립 작가 3인전 개최
활동 시기/일시 1963년 5월 - 김원갑·전혁림과 전시회 개최
활동 시기/일시 1967년 - 한국 근대 미술 60년전 출품
활동 시기/일시 1967년 - 한국 현대 화가 100인전 출품
활동 시기/일시 1970년 - 한국 미술 대상전 추천 작가로 선정
활동 시기/일시 1972년 - 한국신자유미술가회 창립
활동 시기/일시 1974년 - 예술진흥원 개관 기념 초대전에 출품
활동 시기/일시 1974년 - 홍익대학교 박물관 개관 기념전에 초대 출품
활동 시기/일시 1976년 4월 - 개인전
활동 시기/일시 1977년 - 한국 현대 서양화 대전에 출품, 10월 전혁림과 은지화전 개최, 신조형파 회원으로 활동
몰년 시기/일시 2005년연표보기 - 송혜수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5년연표보기 - 송혜수 미술상 제정
출생지 평안남도 평양시
학교|수학지 제국미술학교 - 일본 동경
활동지 자유전 - 일본 동경
활동지 50년 미술협회 - 서울특별시
활동지 한국신자유미술가회 - 부산광역시
활동지 송혜수미술연구소 - 부산광역시
묘소 영락공원 - 부산광역시 금정구 두구동 1494-1지도보기

[정의]

부산에서 활동한 서양화가.

[활동 사항]

송혜수(宋惠秀)[1913~2005]는 1913년 8월 13일에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상수보통학교와 숭인고등보통학교에서 공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유화가 츠다 세이슈에게서 그림 공부를 하였다. 이때 송혜수는 두 살 연상의 이중섭(李仲燮)을 만났다. 1938년 도쿄의 제국미술대학[현 무사시노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여 1943년에 졸업하였다. 1938년에 재동경미술협회·백우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한국 근대 미술의 핵심적인 작가들과 교류하였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주류 미술계인 일본 문전(文展)에 반기를 들고 나온 재야 미술인들이 독립전(獨立展)[뒤에 자유전·창작가 협회전으로 개칭]이라는 활동 공간을 형성하고 있었다.

송혜수는 제국미술대학 재학 시절부터 독립전에 출품하였으며, 이때부터 소를 모티프로 한 다양한 작품을 창작하였다. 소는 민족적 정서를 표출하기 위한 소재로 이해할 수 있으며 평생을 ‘소와 여인’이라는 모티프로 일관된 작품 경향을 보여 주었다. 송혜수는 제6회와 제7회 자유전(自由展)에서 입선하였는데, 1943년에는 자유전에서 본상을 수상하여 평론가로부터 ‘이중섭과 함께 민족성이 강한 작가’로 평가를 받았다. 송혜수의 초기 작품 세계는 소나 말을 주제로 한 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였으며, 초현실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통해서 일제 강점기의 절망 속에서 민족의 현실을 반영하는 암시와 상징을 담기도 하였다.

제국미술대학 졸업 후에 송혜수는 일제의 징용을 피해 중국 둥베이[東北]로 갔다가 해방 후에 서울로 돌아와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서울은 미술동맹과 대한민국미술협회로 조직이 나뉘어 있었는데 송혜수는 김환기·김병기·장욱진·박고성·김영주·남관 등과 일종의 재야파 미술가들의 모임인 ‘50년미술협회’를 결성하였다. 하지만 6·25 전쟁의 발발로 창립전은 무산되고 말았다. 부산으로 피난 온 송혜수는 이후 부산에 정착하였으며, 국방부 정훈국 종군 화가가 되었다. 1951년 장욱진·한묵과 함께 종군 스케치 3인전을 열고, ‘현역 작가 초대전’과 ‘중앙 공보관 개관 기념 한국 현대 대표 작가 초대전’에 출품하기도 하였다. 6·25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송혜수의 그림은 격동하는 시대의 불안하고 참담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6·25 전쟁 이후 송혜수는 부산에서 양달석(梁澾錫)·조동벽·김원갑·전혁림(全赫林) 등과 활동하였다. 1959년 양달석·조동벽과 ‘독립 작가 3인전’을 개최하고, 1963년 5월 김원갑·전혁림과 전시회를 열었다. 이후 1967년 ‘한국 근대 미술 60년전’, ‘한국 현대 화가 100인전’에 출품하였다. 1970년에는 ‘한국 미술 대상전’의 추천 작가가 되었으며, 1972년 부산에서 한국신자유미술가회를 창립하였다. 1974년 예술진흥원과 홍익대학교 박물관 개관 기념전에 초대 작가로 출품하고, 1976년 4월에는 부산 명인 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또 1977년에는 ‘한국 현대 서양화 대전’에 출품하고, 10월 전혁림과 은지화전을 개최하고, 신조형파의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송혜수의 작품들은 오랜 세월 동안 구상과 반추상을 오가며 소와 여인을 다루었다. 송혜수의 작품 경향은 전형적인 아카데미즘과는 뚜렷하게 다른 길을 가고 있었으며, 초기에는 불상이나 말, 소, 수렵도 등을 그렸으나 이후 소와 여인을 즐겨 그렸다. 초기의 소 그림이 민족성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라면, 후기의 소 그림은 강렬한 색채와 선묘를 통해서 회화적인 맛을 찾아내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후년에 송혜수는 송혜수미술연구소를 차려 후진 양성에 힘썼는데, 부산광역시 서구 충무동 부영극장 뒤 청운장 여관 4층, 중구 부평동, 대청동 등 부산 시내 곳곳을 옮겨 다녔다. 송혜수의 문하생으로 김만수·전준자·김정명·허황·안창홍 등 수많은 제자들이 거쳐 갔다. 송혜수는 2005년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전에 살던 집을 팔아 미술상 기금을 마련하였다. 송혜수의 유지를 이어 2005년에 송혜수 미술상이 제정되어 지금까지 주정이·서상환·차경복·안세홍·김정명 등의 수상자를 배출하였다.

[묘소]

묘소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두구동 영락 공원에 마련되었다.

[상훈과 추모]

1941년에 제11회 독립전 공모 부문[일본]과 제4회 재동경 미술 협회전에 출품하여 입선하였고, 1942년에 제6회 자유전 공모 부문[일본]에 출품하여 2점이 입선하였으며, 1943년 제7회 자유전 공모 부문[일본]에 출품하여 6점이 입선하였다. 2005년부터 송혜수 미술상이 제정되어 매년 운영되고 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옥** 상세한 관련 자료로서는, 탄생100주년을 맞이하여 2013년 부산시립미술관이 기획한 <부산의 작고작가9-송혜수>의 전시도록(총p211)을 참조바라며, 특히 송혜수에 관한 좌담회 녹취록기사(p105- 123/좌담자:옥영식,신옥진,전준자,조일상)는 주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2015.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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