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6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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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命九 |
영어음역 | O Myeonggu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249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차철욱 |
[정의]
일제 강점기와 현대 부산 출신의 제면·제분업 자본가.
[가계]
오명구(吳命九)는 1916년 경상남도 동래군 구포[현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서 곡물 객주 오성문(吳成文)의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오명구는 구포공립보통학교와 부산제2공립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41년 무렵 구포에 현대식 자동 설비를 갖춘 광전제분제면공장을 설립하였다. 이 때문에 이 공장을 구포 국수의 원조로 보기도 한다. 1944년 1월 법인 회사로 등기하면서 명칭을 남선곡산주식회사(南鮮穀産株式會社)로 변경하고, 9월 자신을 직접 대표 이사로 등록하였다. 회사는 일제 강점기 말 전시 경제를 이용하여 국수와 밀가루를 군납하면서 성장했는데, 이 무렵 오명구는 동래군에서 호별세를 가장 많이 납부할 정도였다.
해방 후 오명구는 공장을 현대식 5층 건물로 신축한 뒤 제분, 제면, 압맥 생산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하여 중소 제분업자들의 전국 조직인 대한제분협회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1950년대 말 공장을 전포동으로 옮기면서 사업을 확장하던 중 태풍 사라호의 영향으로 제분 재료가 침수되면서 커다란 타격을 입고 사향 길에 접어들었다. 남선곡산주식회사 외에도 욱제망(旭製網) 등 10여 개 업체를 운영했으나 이 역시 경제적 손실과 정치적 영향으로 이전의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한편, 오명구는 사회사업에도 많은 투자를 하였다. 1950년대 구포, 사상, 개금, 가야 등지에는 중등 교육 기관이 없어 지역 청소년들이 부산 광역 시내까지 기차나 버스로 통학을 해야 하였다. 이에 1953년 남녀 공학인 구포중학교[현 가람중학교]를 설립하여 1956년 경상남도에 증여하였다. 또 구포 대리에서 새시장 쪽으로 흐르는 대리천에 만화교(萬華橋)를 가설하기도 했는데, 이는 낙동강 제방 7호 수문 앞에서 구포와 화명동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제 역할을 다하였다. 1962년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오명구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 구포중학교 학도호국단 명의로 1956년 구포중학교 교정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