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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633
한자 己未育英會
영어공식명칭 Gimi Yukyeonghoe
영어의미역 Gimi Scholarship Society
이칭/별칭 부산육영회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귀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족 운동 단체
설립자 안희제
설립 시기/일시 1919년 11월연표보기 - 기미육영회 창립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1년 3월 21일 - 임시 총회 열어 임원 개선
최초 설립지 부산광역시

[정의]

1919년 11월 부산 지역에서 한국인 청년 유학생 지원을 목적으로 결성된 장학 단체.

[설립 목적]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는 3·1 운동으로 민족 운동의 열기가 크게 드높아진 분위기 속에서, 3·1 운동의 주역으로 등장한 청년 세대가 그 정신을 계승하여 민족 독립과 민족 문화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가난한 청년 인재에게 외국 유학의 길을 열어 주고자 설립되었다.

[변천]

안희제(安熙濟)는 3·1 운동 직후 백산상회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육영회 설립을 발기하여 1919년 11월에 기미육영회를 결성하였다. 이때 취지문과 회칙과 선발 내규를 발표하였는데, 회칙에 따르면 기미육영회는 본부를 부산에 두고, 회원의 부담금으로 운영되는데, 회원은 해마다 100원 이상의 부담금을 5년 동안 납부해야 한다. 또 간사 다섯 명을 두고 회의 사무를 관리케 하며, 그 가운데 한 사람을 대표 간사로 정하고, 회원 가운데 평의원 10명을 선정하여 회의 사무를 평의하게 하였다. 간사, 평의원은 총회에서 선출하되 임기는 각각 3년, 2년으로 하였다. 초량동 전병학(全秉鶴)의 주소를 연락처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따로 사무실과 상근자를 두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학생 선발 내규에 따르면 중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를 선발하되 전혀 학력이 없더라도 특출한 인재라고 인정받으면 선발될 수 있었다. 간사회에서 사정한 후보자의 이력서와 논문을 평의회에 제출하면, 평의회는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하였다.

창립 당시 간사는 안희제[백산상회 전무 취체역], 윤현태(尹顯泰)[백산상회 취체역], 윤병호(尹炳浩)[백산상회 지배인 겸 취체역], 최태욱(崔泰旭)[부산 태공상회 주인], 전병학[경남은행 부지배인]이었고, 평의원은 문상우(文尙宇)[경남은행 지배인], 송태관(宋台觀)[부산 부호], 조동옥(趙東玉)[백산상회 취체역], 이우석(李愚奭)[백산상회 취체역], 전석준(全錫準)[부산진일기포장], 윤상은(尹相殷)[부산부 협의회 회원], 손영순(孫永詢)[밀양 거주, 부산 주일상회 주무], 최연무(崔演武)[주일상회 주인], 김시구(金時龜)[부산상업회의소 부회두], 김존석(金存錫)[합천 거주, 부산 체재 무역상] 등이었다. 이들의 면면은 백산상회 임원을 중심으로 한 부산에서 활동하던 자본가들이었다.

창립 이후 회원이 확대되어 1920년 5월에는 43명에 이르렀다. 회원 약정 금액도 2만 원을 넘어섰다. 하지만 경제 공황으로 인한 극도의 금융 긴축 속에서 회원들의 부담금 납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1921년 3월 27일에 임시 총회를 열어 타개 방안을 의논하였다. 이때 임원 개선이 이루어져 전석준과 윤병호가 간사로 선임되었다. 이를 계기로 다시 활기를 되찾았으나 이후의 활동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기미육영회는 해마다 10명씩 수재를 선발하여 외국 유학을 보내고자 하였다. 1920년 3월 김정설(金鼎卨)[경상북도 경주]을 첫 유학생으로 일본 도쿄에 파견한 데 이어 같은 해 4월 26일에는 이병호(李炳虎)[경상남도 동래,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이제만(李濟晩)[경상남도 동래], 전진한(錢鎭漢)[경상북도 상주], 문시환(文時煥)[경상남도 동래] 등 4명의 청년을 도쿄로 파견하였다. 이들과 더불어 선발된 수재 가운데 여러 명이 민족 운동과 관계된 탓에 유학을 떠나지 못하였다.

그 이후에도 유학생 파견은 이어져 1921년 초까지 김준연(金俊淵)[전라남도 영암], 박장룡(朴璋龍)[경상남도 동래], 윤필균(尹弼均)[경상남도 동래] 등 십여 명을 일본과 중국, 구미로 보냈으며 달마다 각각 50원의 학비를 지급하였다. 전진한의 증언에 따르면 유억겸(兪億兼)[서울], 서춘(徐椿)[평안북도 정주], 최승만(崔承萬)[경기도 안산]도 전진한과 더불어 기미육영회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고 한다.

기미육영회가 부산에서 결성된 장학 재단인 만큼 동래군 청년들이 다수 선발되었지만 선발 대상이 전국에 걸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호상(安浩相), 이극로(李克魯), 신성모(申性模)기미육영회 유학생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는 이들이 안희제와 동향인 의령 출신으로 안희제의 활동과 연관되어 있었던 탓에 그렇게 추정하는 것일 뿐 근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의의와 평가]

3·1 운동 직후에 큰 규모의 장학 재단이 신속히 구성되어 운영된 사실은 이 시기 부산의 조선인 자본가들이 백산상회를 중심으로 굳게 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미육영회는 일제 강점기를 대표하는 선구적 육영 단체로서 조선육영회를 비롯하여 각지의 육영 단체가 설립되는 데에 자극을 주었다. 또한, 가난한 수재들에게 외국 대학에 유학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줌으로써 민족의 고급 인재를 육성하려는 기미육영회의 움직임은 1923년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무엇보다도 기미육영회가 파견한 유학생은 이후 민족 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하였으며 해방 이후 사회 각 분야에서 선구적 업적을 남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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