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3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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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炳浩 |
영어음역 | Yun Byeongho |
이칭/별칭 | 창남(滄南)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백산길 13-1[동광동 3가 1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가계]
호는 창남(滄南). 아버지는 농사꾼 윤태의이고, 어머니는 최호영이다.
[활동 사항]
윤병호(尹炳浩)[1889~1974]는 1889년 8월 5일에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문의리에서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둘째 형 윤도청의 권유로 190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으며 이때부터 항일 투쟁의 길로 접어들어 1909년 10월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였다. 1911년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 전문부에 입학하였다. 1915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윤상태, 서상일 등이 조직한 조선국권회복단에 가담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남도 창원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조선국권회복단 조직이 발각되었으며 단원 26명과 함께 1919년 8월 4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1919년 백산상회가 주식회사로 전환할 때 윤병호는 500주를 출자하고 지배인을 맡아 운영에 참가하였다. 동년 11월에는 안희제(安熙濟)를 비롯한 백산무역회사 관계자와 영남 유지들과 힘을 합해 기미육영회를 설립하자 윤병호는 조국 해방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애국 청년들을 선발하고 유학시키는 자금을 제공하였다. 이를 통해 다수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1921년에는 안희제 등과 함께 도항 증명제 폐지 투쟁에 앞장서는 등 지역 사회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26년 경상남도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한 면에 하나의 보통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1면 1교제’를 제안하기도 하였다.
1929년 10월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자 윤병호는 여기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로 인해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하였으며 1943년 9월 18일 기소 유예로 석방되었다. 해방 후 경상남도 농상부장을 지냈고 1954년 제3대 국회 의원 선거에 남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4년 7월 13일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문의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3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노량 공원 내에 윤병호의 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