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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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善琪 |
영어음역 | Bak Seongi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대래 |
[정의]
부산 출신의 대선발효공업주식회사 경영자.
[개설]
박선기(朴善琪)는 1912년 6월 16일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593번지에서 부친 박계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슬하에 5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박선기는 부산공립직업학교[현 부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업인 제재업에 종사하였다. 스포츠와 사진에 취미가 있던 박선기는 부산공립직업학교 재학 중 정구 선수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해방을 맞이할 무렵 친형 박경영(朴敬英)이 삼광제재소(三光製材所)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전국적인 판로를 갖고 있던 귀속 재산인 신세계양조장의 관리권을 얻게 되자 박선기는 박경영을 보좌하게 되었다.
한편, 박선기는 1946년 7월 10일 임의 단체로 설립된 부산상공회의소의 광공부 의원으로 당선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신세계양조장의 상호를 대선발효공업주식회사로 바꾸고 새롭게 발족하려 할 무렵인 1947년 9월 13일 박경영이 피살되면서 대선발효공업주식회사의 관리권을 사이에 둔 쟁탈전이 벌어졌다. 결국 박경영의 동생인 박선기의 연고권이 인정되어, 박선기는 1949년 1월 관리권을 승계하여 사장에 취임하였다. 취임과 더불어 박선기는 회사 명칭을 대선발효공업주식회사[현 대선주조]로 바꾸는 한편, 1949년 7월 10일 부산상공회의소[제2대] 광공부 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하였다.
6·25 전쟁으로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자 박선기는 대선발효공업주식회사를 경영하는 한편 1951년에는 대한주정협회 회장에 취임하고 국제주정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여하였다. 이 무렵을 전후하여 그는 당밀(糖蜜) 수입으로 일약 거부가 되었고, 6·25 전쟁이 끝난 뒤에는 명실공히 부산 실업계의 거물로 등장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박선기는 1952년 9월 17일 제3대 부산상공회의소 상임 의원 및 광공부 의원으로 당선되고, 1954년 1월 25일 정식으로 출범한 초대 부산상공회의소와 1957년 1월 26일의 제2대 부산상공회의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58년 4대 국회 의원 선거에 부산 동구에서 자유당 후보로 입후보하였다가 낙선한 이후 사업에 전념하였다. 1960년 제주도의 주정 공장을 인수하여 대량 생산에 성공하였고, 동시에 주정, 이연주, 맥주 등 기존 사업에도 기술과 시설을 도입하여 사업을 확장하면서 의욕적으로 경영하였다. 그 결과 1960년 1월 20일 제3대 부산상공회의소 의원 총회에서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961년 8월 24일 제4대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취임하여 부산 상공계의 발전에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박선기는 품성이 유연하고 사교적일 뿐 아니라 기부에도 적극적이어서, 1952년 부산대학 기성회장에 취임하여 빈약한 지방 대학의 재정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1952년 12월 부산대학이 미국의 한국민사원조처[KCAC]로부터 20개 교실 신축분의 자재를 무상으로 원조 받으면서도 건축비가 없어 곤란을 겪자 5,299만 원을 기탁하여 공사를 지원하였고, 부산대학의 무지개문 건립에도 200만 원을 후원하였다.
1956년 부산컨트리구락부를 창립하고 해운대에 골프장을 신설하여 많은 자금을 희사, 육성하였다. 1960년에는 부산체육회장에 취임하였으며, 부산공업고등학교와 경남여자중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의 기성회장을 지내면서 후원에 힘썼다. 한편으론 남광고아원과 남광학원의 이사장으로서 전쟁고아를 비롯한 기아, 미아 등 지역 내 불우 아동을 보살피는 데에도 힘썼다.
1962년으로 들어서며 당시 부산시장 배상갑(裵上甲)의 요청에 따라 남광학원을 계승한 남광종합사회복지관의 이사장을 맡는 등 사회사업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외에 전국주류조합중앙회 부회장, 경남연식정구협회장, 부산항만발전추진위원장, 경상남도체육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62년 4월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으로 경제 시찰단 27명을 인솔하여 일본을 시찰하던 박선기는 나고야[名古屋]에서 뇌일혈로 졸도하여, 5월 17일 향년 51세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