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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국채 보상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565
한자 梵魚寺國債報償運動
영어의미역 National Debt Redemption Movement at Beomeosa Templ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나철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건
관련인물/단체 범어사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7년 3월연표보기 - 이보담, 홍월초 등이 불교연구회에 모여 국채보상운동 참여 결의
전개 시기/일시 1907년 7월 3일 - 범어사에서 국채보상금63원10전을 기부
발생|시작 장소 범어사 -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지도보기

[정의]

1907~1908년 부산 범어사에서 전개된 국채 보상 운동.

[역사적 배경]

국채 보상 운동(國債報償運動)은 대한제국이 일본에서 빌린 차관을 국민의 힘으로 갚아 경제적 예속 상태를 벗어나고자 한 운동이다. 차관이 1300만 원에 이른 1907년경에 경상도 동래,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 보상 운동은 서울, 진주, 평양 등 전국에서 각계각층이 참여하였다.

[경과]

1907년 3월 이보담, 홍월초 등이 불교연구회에 모여 통상회를 열고 국채보상운동회에 적극 참여하기로 결의를 하였다. 이후 국채 보상 운동에 불교계의 참여가 잇따랐다. 1907년 4월 9일자 『대한 매일 신보』에는 건봉사(乾鳳寺), 봉명학교(鳳鳴學校), 만일회염불계(萬日會念佛契)의 이름으로 146원 76전을 출연한 기사가 실려 있다. 이를 시작으로 경기도 화장사, 유점사 유신학교, 밀양 표충사에서도 국채 보상 의연금을 갹출하였다. 범어사에서도 1907년 7월 3일자 『대한 매일 신보』 기사에 63원 10전을 국채 보상 의연금을 모금하여 기부한 사실이 확인된다.

[결과]

국채 보상 운동의 성과를 우려한 일제가 운동의 주축이었던 『대한 매일 신보』의 주필인 양기탁(梁起鐸)을 보상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어 구속함으로써 국채 보상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범어사는 국채 보상 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범어사 지방학림 및 보통학교 설립, 포교당과 야학 등을 개설함으로써 종교적 한계를 벗어나 민족의 역량 발전에 일조하였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가 국채 보상 운동에 참여한 것은 1919년 3·1 운동을 거쳐, 1920~30년대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항일 민족 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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