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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최익현 운구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543
한자 義兵將崔益鉉運柩事件
영어의미역 An Episode of the Funeral Procession for Choe Ikjyeon, Chief of the Righteous Army, Headed for the Burial sit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차철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항일 운동
관련인물/단체 최익현|부산항상회소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7년 1월 6일연표보기 - 의병장 최익현 운구 쓰시마에서 부산항 도착
종결 시기/일시 1907년 1월 7일연표보기 - 의병장 최익현 운구 부산을 떠나 본가로 이송
발생|시작 장소 부산항상회소 - 부산광역시

[정의]

1907년 1월 일본 쓰시마에서 사망한 의병장 최익현(崔益鉉)의 운구 과정에서 발생한 부산항민의 항일 운동.

[역사적 배경]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 체결, 1895년 을미사변 후 단발령을 계기로 항일 운동을 전개했던 최익현이 1906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본군에게 패배하여 일본 쓰시마 섬에 감금되었다. 최익현이 쓰시마로 압송될 때 부산항민들은 모두 나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최익현은 단식으로 저항하다가 1907년 1월 1일[음력 1906년 11월 17일]에 일본 쓰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경과]

최익현의 시신은 1907년 1월 6일[음력 1906년 11월 22일] 부산으로 운구하였다. 부산상무회의소 회원과 부산항민들이 최익현의 시신을 맞이하였다. 최익현의 영구가 부산에 도착하자 부산항민들은 집집마다 조문하는 기를 달고 일을 멈추었다. 부산항상회소에 빈소를 마련하였는데 각지에서 많은 조문객들로 북적거렸다. 동래부 기생들도 국문으로 만장을 지어 올렸고, 범어사 승려들도 불교식 제례를 지냈다.

부산항 과부 셋은 제물을 머리에 이고 40리 길을 달려와 “대감 제수는 일본인 차에 실을 수 없다”고 항의하면서 상복을 입었다. 부산항민들의 움직임에 동래부 참서관 최덕(崔悳)이 인력거를 타고 운구 행렬 앞으로 진격하여 가로 막았다. 부산항민들이 반발하자 흥분하여 경무서에 연락해 여러 사람들을 검거하였다. 부산항민들과 각 학교 학생들이 모두 등소(等訴)하여 즉시 석방시켰다. 동래 부윤 김교헌과 최덕이 조문하러 오자 상주가 최덕의 조문을 거절하였다. 2일을 부산에서 머무르다가 출발하였는데, 학생들이 각지에 연락하였고, 거리에는 수만 장의 만장이 하늘을 가렸다. 운구는 부산진, 구포, 김해, 성주, 공주를 거쳐 15일 만에 본가가 있는 정산(定山)에 도착하였다.

[의의와 평가]

의병장 최익현 운구 사건은 1905년 이후 전국적으로 항일 운동이 활발해지는 흐름 속에서, 부산에서는 국채 보상 운동 직전에 일어난 항일 운동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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