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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535
한자 關釜連絡船
영어의미역 Busan-Sinomoseki Ferry|Kanfu Cross-channel Liner Ship
이칭/별칭 부관 연락선,전시 노예선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5가 16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최영호 2

[정의]

1905년부터 1945년까지 부산항과 시모노세키 항 사이를 정기적으로 운항한 여객선.

[개설]

러일 전쟁이 종결된 후 경부선 철도가 부산에서 서울까지 연장되자, 이를 계기로 일본의 산요기선주식회사[山陽氣船株式會社]는 일본의 산요선 철도와 한국의 경부선 철도를 연결하기 위한 선박 수송을 계획하고, 정기 여객선 운항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05년 9월에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를 잇는 1,680톤 급의 정기 여객선 이키마루[壹岐丸]가 시모노세키 항에서 취항하였다. 이것이 일본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첫 번째 정기 연락선이었다.

이후 1945년 일본의 패전 직전에 미군의 공습으로 항로가 차단되면서 정기 여객선으로서의 생명이 중단될 때까지 관부 연락선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잇는 대표적인 운송 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일본의 패전 직후에는 한때 한반도와 일본에서 귀환자들을 수송하는 선박이 이 항로를 정기적으로 왕복하였다.

일제 강점기 여객 수송과 해방 직후의 귀환자 수송을 합하면 총 3000만 명 이상의 승객이 관부 연락선을 이용하였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의 국교가 수립된 후 부산시와 시모노세키 시 사이에 정기 여객선 재개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그 결과 1970년 1970년 6월 19일에 관부 페리호가 운항을 시작하였고 1983년 4월 27일에는 부관 훼리호가 운항을 시작하였다.

[연원 및 변천]

일본 재계를 중심으로 한반도와 일본을 연결하는 정기 항로를 취항시키려는 움직임은 개항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실업가이며 제일국립은행(第一國立銀行) 총감인 시부자와 에이이치[澁澤榮一]는 부산을 방문하여 일본인의 상업 실태를 시찰하였다. 그 후 최초의 일본인 무역 상사인 대창조상회(大倉組商會)를 설립 운영하고 있던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와 공동으로 서명하여 1877년 8월에 정기 항로 개설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들은 메이지 정부의 대장성(大藏省)에 조선과의 무역을 확장하기 위해 자금 10만 엔을 대부할 것과 매월 2~3회의 정기 항로를 열 것을 건의하였다. 이때 메이지 정부는 규슈[九州] 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된 세이난 전쟁[西南戰爭]으로 인해 혼란한 정국이 진정된 후에 운항을 허락하겠다고 회답하였다.

1890년대에 들어서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 인적 이동과 물동량이 증가함에 따라 정기 항로 개설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1893년에 일본의 민간 회사에 의해 인천과 오사카[大阪] 그리고 모지[門司]를 연결하는 645톤 급의 기소가와마루[木曾川丸]가 취항하였고, 이어서 1902년에는 원산과 4, 원산과 모지를 연결하는 746톤 급의 스미다가와마루[隅田川丸]가 취항하였다. 이 두 선박의 운행이 근대 한일 양국 항로의 효시가 되었으며 부산~시모노세키 사이의 항로에 정기 연락선이 취항하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1905년 9월 11일 밤 이키마루[壹岐丸] 선박이 시모노세키 항을 떠나 다음날 아침 부산에 도착하였다. 당시 운항 시간은 11시간 30분이었고 여객 운임은 1등실 12엔, 2등실 7엔, 3등실 3엔 50전이었다. 이키마루 선박은 길이 82미터, 폭 10.9미터, 총 규모는 1,680톤에 달하였다. 여객 정원 317명, 화물 300톤을 적재할 수 있는 규모였다. 영국의 해외 항해 선박을 모방하여 만들어져 선단에서 선미까지 평평한 갑판으로 되어 있었다. 1905년에는 부산항에 이 배를 직접 접안시킬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초량 앞바다에 정박한 후 소형 선박을 통해 승객과 화물을 부두로 이동시켰다.

그 후 부산항과 시모노세키 항의 접안 시설이 근대화되면서 정기 여객선의 규모와 편수가 계속 늘어갔다. 일제 강점기에 걸쳐 시기에 따라 약간 승객 수가 감소한 경우도 있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연락선을 통한 인구 이동은 계속 증가되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1943년 10월 미국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곤론마루[崑崙丸] 선박이 침몰하는 등 피해가 심해졌다. 1945년 6월 20일 일본 정부는 관부 연락선의 모든 선박을 안전한 항로로 옮길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부산과 시모노세키 사이의 항로는 사실상 중단되었으며 일제 강점 하의 관부 연락선은 종말을 맞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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