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4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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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嚴秉永 |
영어음역 | Eom Byeongyeong |
이칭/별칭 | 엄정우(嚴正友)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로136번길 30[복천동 375-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이칭은 엄정우(嚴正友). 아버지는 의관직(議官職)에 있었던 엄석찬(嚴錫贊)이다. 동래 장터 3·1 운동을 주도한 엄진영(嚴進永)의 친동생이다.
[활동 사항]
엄병영(嚴秉永)[1902~1974]은 1902년 6월 8일에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375-1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을 무렵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3월 7일 서울에서 온 학생 대표와 부산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고등학교] 학생 대표를 통해 독립 선언서가 전해지면서 서울과 평양 등지의 3·1 운동 소식이 부산에도 전해졌다. 4학년이었던 김귀룡(金貴龍)·엄진영(嚴進永) 등은 동급생과 하급생인 2·3학년 대표들과 함께 동래 3·1 운동 계획을 세웠다. 이어 3월 10일 동래고등보통학교 선배이며 경성고등공업학교에 다니던 곽상훈(郭尙勳)이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부산에 오면서 계획이 더욱 구체적으로 진행되었다. 거사일이 동래 장날인 3월 13일 오후 2시로 정해졌고 엄병영 등은 3월 11일부터 13일에 걸쳐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만들었다.
3월 13일 오후 2시가 되자 엄병영의 형인 엄진영이 동래군청 앞 망미루(望美樓)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이를 신호로 엄병영은 주동 학생들과 같이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고 주위의 장꾼들도 호응하여 장터가 독립의 의기로 가득 찼다. 그러나 출동한 기마경찰과 일본군에 의해 엄병영을 비롯한 22명의 학생들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엄병영은 1919년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엄병영은 동래고등보통학교 선배인 최현배(崔鉉培)의 권유로 한글 보급에 투신하여 1927년 국내 최초로 종성부용초성(終聲復用初聲)을 이용한 속기 방식을 개발하였다. 해방 이후 한독당에 입당해 좌우 합작 및 통일 운동에 앞장섰다. 1974년 12월 15일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5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