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436 |
---|---|
한자 | 徐鎭冷 |
영어음역 | Seo Jinraeng |
이칭/별칭 | 서진령(徐鎭泠)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로152번길 9[칠산동 240]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서진랭(徐鎭冷)[1899~1971]은 1899년 5월 4일에 경상남도 김해시 상동면 우계리 698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 동래 장터 3·1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3월 7일 김귀룡(金貴龍)·엄진영(嚴進永) 등이 서울에서 온 학생 대표와 부산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고등학교] 학생 대표로부터 독립 선언서를 전해 받으면서 동래 지역 만세 운동의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서진랭은 동급생인 추규영(秋圭暎)·손영수·김기삼(金琪三)·정호종(鄭浩宗)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운동 계획에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3월 10일에 동래고등보통학교 선배이며 경성고등공업학교에 다니던 곽상훈(郭尙勳)이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면서 시위 계획이 더욱 구체적으로 진행되었다.
서진랭은 주동 학생들과 함께 복천동에 있던 엄진영과 오종식(吳宗植) 등의 집과 정호종·백정기(白正基)·고영건(高永建)의 하숙방을 전전하며 협의한 끝에 동래 장날인 3월 13일 오후 2시를 거사일로 정하였다. 서진랭은 3월 11일부터 13일에 걸쳐 고영건의 하숙집에서 학교 등사판을 이용하여 500여 매의 독립 선언서와 대형 독립기, 수백 매의 태극기와 고종 황제의 독살을 폭로하는 ‘오왕약살(吾王藥殺)’이라는 격문도 준비하였다.
3월 13일 오후 2시가 되자 엄진영이 동래군청 앞 망미루(望美樓)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이를 신호로 서진랭은 다른 주동 학생들과 함께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고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였다. 주위에 모인 학생들과 장꾼들도 호응하여 읍내는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러나 소식을 들은 50여 명의 일본군과 기마경찰이 출동하여 야만적인 발포를 하며 닥치는 대로 군중을 체포하였다. 서진랭은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부산감옥소에 투옥되었다.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8월형을 선고 받자 이에 불복하여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71년 3월 11일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