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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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永建 |
영어음역 | Go Yeongge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1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고영건(高永建)[1897~1941]은 1897년 12월 12일에 김해군 대저면 평강리 69번지[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1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고영건이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일 때 서울에서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던 3·1 운동의 소식이 부산에도 전해졌다. 이어서 3월 7일에 서울에서 온 학생 대표와 부산상업학교 학생 대표가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와서 만세 시위를 협의하였다.
고영건은 엄진영(嚴進永)·김귀룡(金貴龍) 등과 만나 독립 선언서를 전해 받고 동래 지역에서 만세 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중 3월 10일 동래고등보통학교 선배이며 경성고등공업학교에 다니던 곽상훈(郭尙勳)이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였다. 곽상훈은 수학 교사 이환(李環)과 만나 독립 만세 운동에 대하여 상의하고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만세 시위의 배후에서 참모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고영건 등 시위를 준비한 학생들은 협의를 거쳐 동래 장날인 3월 13일 오후 2시를 거사일로 정하였다. 고영건은 3월 11일부터 13일에 걸쳐 자신의 하숙집을 제공하였으며 학교 등사판을 이용하여 500여 매의 독립 선언서와 대형 독립기, 수백 매의 태극기를 만들고 고종의 독살을 폭로하는 오왕약살(吾王藥殺)이라는 격문도 준비하였다.
3월 13일 오후 2시가 되자 엄진영이 군청 앞 망미루(望美樓)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이를 신호로 고영건은 학생들과 같이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고 주위의 장꾼들도 호응하여 장터는 독립의 의기로 가득 찼다. 그러나 소식을 들은 50여 명의 수비대와 기마경찰들이 출동하여 군중과 학생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고영건도 체포되어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을 선고 받고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6월에 역시 징역 1년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고영건은 출옥 후 일본 도쿄[東京]로 유학하여 메이지대학[明治大學] 학부를 졸업하였으며, 중국 둥베이[東北]로 가서 민족 해방 운동에 자금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다가 1941년 8월 21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3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