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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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楊奉根 |
영어음역 | Yang Bonggeu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양봉근(楊奉根)[1895~1990]은 1895년에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에서 태어났다.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12년 사립화명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양봉근은 신학문과 의학에 관심을 두고 1918년 서울의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하였다.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에 3·1 운동이 발발하자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과 독립 만세 시위에 적극 참가하였다.
양봉근은 3월 중순경 3·1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고향인 동래군 구포면으로 내려갔다. 이전에 사립화명학교의 동료 교사였던 임봉래(林鳳來), 윤경(尹涇), 유기호(柳基護) 등을 만나 서울과 평양을 비롯한 전국의 시위 소식과 독립 선언서를 전달했으며 구포 지역에서의 의거를 일으키라고 독려한 뒤 서울로 돌아갔다.
양봉근은 1921년 재학 중이던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우리 민족을 멸시하는 발언을 한 생물학 교수의 퇴진을 요구하고 전교생의 자퇴서를 제출하는 등 학원 투쟁에 앞장섰다. 결국 졸업 3개월을 앞두고 퇴학을 당하였으며 그 후 자력으로 의사 면허를 받아 울산에서 개원하였다. 1927년 신간회 울산지회가 조직되면서 양봉근이 울산지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30년에는 신간회 중앙검사위원장이 되었다.
양봉근은 1931년 신간회가 해체된 이후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서울의 수표동으로 병원을 이전하였으나 그곳에서도 감시가 심해 함경북도 회령군으로 이전하였다가 다시 중국 동북의 장춘(長春)으로 망명하였다. 해방 후에도 중국에 머물다 1990년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