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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405
한자 白光欽
영어음역 Baek Gwangheum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조선노농총동맹 집행위원
출생 시기/일시 1895년 5월 24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4년 - 사립동명학교 고등과 4회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09년 - 대동청년단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21년 - 동래청년구락부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2년 - 동래청년회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2년 1월 - 무산자동지회 중앙집행위원 재임
활동 시기/일시 1922년 - 조선노동공제회 상무간사 재임
활동 시기/일시 1922년 10월 18일 - 조선노동연맹회 중앙집행위원 재임
활동 시기/일시 1923년 - 동래청년회 집행위원장 재임
활동 시기/일시 1923년 - 마산노동동우회 집행위원 재임
활동 시기/일시 1924년 2월 - 신흥청년동맹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24년 - 조선노농총동맹 집행위원 재임
활동 시기/일시 1924년 5월 - 삼산노농연합회 집행위원 재임
활동 시기/일시 1925년 3월 - 동인회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25년 4월 - 조선공산당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6년 -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
활동 시기/일시 1927년 10월 - 병보석으로 석방
몰년 시기/일시 1927년 12월 13일연표보기 - 백광흠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3년연표보기 -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26년연표보기 - 조선공산당 사건
출생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319-1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319-1
학교|수학지 사립동명학교 -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240지도보기
활동지 동래청년회관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462지도보기
활동지 서울시
활동지 마산시
묘소 동래공동묘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장2동[대명여고와 명서초등학교 아래 천주교 묘지]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백광흠(白光欽)[1895~1927]은 1895년 5월 24일에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면 복천동 319번지[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319-1번지]에서 태어났다. 1909년 박중화(朴重華)·신백우(申伯雨)·안희제(安熙濟)·남형우(南亨祐) 등 동지 80여 명과 함께 신민회 계열의 비밀 결사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4년 사립동명학교[현 동래고등학교]를 졸업[4회]한 후에는 청년 운동, 노동 운동, 사회주의 운동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민족 해방 운동에 참여하였다.

1921년 무렵에는 조희수(趙熙守)·윤필균(尹必均)·이환(李環) 등과 동래청년구락부에서 활동하였다. 사립동명학교 선후배를 중심으로 결성된 이 단체는 순회 초청 강연을 하거나 동래군의 각 면에 강연자를 파견하는 등의 문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동래청년구락부동래청년회로 전환되었다. 백광흠은 1923년에 동래청년회 집행위원장과 마산노동동우회 집행위원을 맡았으며 1924년 동래청년동맹의 결성에 참여하는 등 동래 지역을 중심으로 사회 운동에 앞장섰다. 이후 1926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되기 전까지 『조선 일보』 동래지국장과 부산지국장을 맡기도 하였다.

노동 운동과 관련하여 백광흠은 1922년[또는 1923년] 조선노동공제회의 상무간사로 활동하였으며 1922년 10월 18일에는 노동 단체 10여 개를 연합하여 창립한 조선노동연맹회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1924년 결성된 조선노농총동맹의 집행위원 및 마산노농동우회와 삼산노농연합회의 집행위원을 지냈다.

한편 1922년 1월 윤덕병(尹德炳)·김한(金翰)·신백우·원우관(元友觀)·이혁로(李爀魯)·이준태(李準泰)·김달현(金達鉉)·김태환(金泰煥) 등과 무산자동지회를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무산자동지회는 사회주의 사상 단체로 같은 해 3월 신인동맹회와 합쳐져 무산자동맹회가 되었다. 백광흠은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는 전국 강연에서 강사로 활동하였다. 1924년 2월 화요파의 청년 단체인 신흥청년동맹의 결성에 참여하였고, 1925년 3월 경상남도 지역의 사상 단체인 동인회를 발기하였으며, 1925년 4월 서울에서 창립된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6년 6·10 만세 운동으로 2차 조선공산당이 드러나면서 책임비서 강달영을 비롯한 당원 176명이 검거되었으며, 이때 백광흠도 체포되어 잔학한 고문에 시달렸다. 이후 1년여 간의 예심 끝에 1927년 9월 공판이 시작되었는데, 백광흠의 건강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일제 경찰은 백광흠의 혐의를 입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죄명을 누락시킨채 기소장을 제출하였다. 이에 백광흠은 기소의 부당함을 들어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자 일제는 어쩔 수 없이 1927년 10월 병보석으로 백광흠을 석방하였다.

백광흠은 풀려나서 동래 칠산동에 있는 친구의 집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1927년 12월 13일 사망하였다. 동래청년회 등 7개 단체가 백광흠의 장례를 단체장으로 치르고자 하였으나, 일제는 그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부산, 동경, 양양, 창원, 벌교, 단천, 강화 등 각지에서 추도회를 개최하려 하였으나 이들 중 대다수도 금지를 당하였다. 슬하에 아들 2명을 두었다.

[묘소]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장2동의 동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현재 이곳은 주택 단지로 개발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상훈과 추모]

1963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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