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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400
한자 東學農民運動
영어의미역 Donghak Peasants’ Uprising|Donghak Peasant Revolution
이칭/별칭 동학농민전쟁,갑오농민전쟁,갑오농민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승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농민 운동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4년연표보기 - 발생
발생|시작 장소 부산광역시

[정의]

1894년 경상남도 일대에서 전개되어 부산 지역에도 큰 영향을 미친 농민 운동.

[개설]

1894년 음력 3월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 농민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부산은 개항 이후 일본 전관 거류지가 형성되어 있었고 일본군 수비대들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직접적인 봉기는 없었으나, 경상남도 일대에서 전개된 농민 운동은 부산의 일본인 사회를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역사적 배경]

동학 농민 운동은 반봉건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것을 기회로 청일 전쟁을 일으키고 조선 정부를 장악하면서 친일 내각을 수립하여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에 농민군들은 투쟁의 방향을 반외세 운동으로 전환하여 서울 진공을 단행하였으나, 결국 일제의 무력 앞에 공주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농민군들이 지향했던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는 그 이후 면면히 계승되어 3·1 운동을 비롯해 일제 강점기 항일 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경과]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난 뒤 전봉준(全琫準)은 경상남도 동부 지역에 정보 수집을 위해 농민군 2명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7월 29일 창원, 8월 3일 마산, 8월 5일 진해, 8월 7일 고성과 통영, 8월 20일 김해, 8월 27일 동래, 8월 28일 기장을 거쳐 8월 29일 울산 등을 순방하고 각 지역의 정황들을 수집하였다. 이들은 9월 3일 수영에서 검거되었는데 동학도가 아님을 내세워 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전후 상황을 보았을 때 이들이 동학 농민군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비록 동래와 기장 지역에서 실제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모종의 논의들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결과]

동학 농민 운동 기간 동안 부산 지역민들의 직접적인 봉기는 없었다. 그러나 부산항에 정박 중이던 일본 군함이 일본인 거류민들의 동요를 막고 용기를 심어주기 위해 실력 과시의 실탄 사격을 할 정도로 동학 농민 운동의 소식은 부산 거주 일본인들에게 위협적이었다. 실제로 이 기간 동안 일본인들의 무역 거래가 침체되었으며, 700여 명의 일본인들이 귀국하였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부산 거주 일본인들의 위기감과 동향을 통해, 역으로 동학 농민 운동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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