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3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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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國淸寺所藏扁額 |
영어의미역 | Picture Frame, a Collection of Gukcheong-sa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북문로 42[금성동 397]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지현 |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국청사(國淸寺) 대웅전에 있는 조선 후기의 편액.
[개설]
편액은 보통 현판(懸板)이라고 부르며, 대부분 가로로 장방형을 이루어 횡액(橫額)이라고도 한다. 부산광역시 금정구의 국청사에는 2개의 편액(扁額)이 남아 있다. 모두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국청사의 내력을 적고 있다.
[형태]
국청사 소장 편액(國淸寺所藏扁額) 2개는 모두 가로로 긴 장방형의 목제 판 형태를 지닌다. 목제 판에는 먹색으로 바탕을 칠한 후 백색의 글자를 새기거나 적어 놓았다. 국청사 소장 편액①은 가로 135.5㎝, 세로 33.5㎝의 크기에 해서체로 음각되어 있으며, 국청사 소장 편액②는 가로 89㎝, 세로 30.5㎝의 보다 작은 규모로, 행초 서체로 글을 적어 놓았다.
[특징]
편액은 건물이나 문 등에 걸어 건물의 명칭이나 내력 등을 알려 주는 역할을 한다. 국청사 소장 편액①에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국청사라는 절 이름의 유래와 중수 기록, 그리고 시주자와 시주 내역, 화주, 각수자 등을 밝히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국청사는 신라 시대부터 존재하였으나 이름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강희 계미년(康熙癸未年)인 1703년(숙종 29)에 축성을 쌓은 후 나라를 지키고 보호하는 일에 관여하게 되므로 국청사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국청사의 중수가 거듭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도광 갑신(道光甲申)[1824년]의 다음 해인 을유년(乙酉年)[1825년]에 중수를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국청사 소장 편액②에서도 경인년(庚寅年)에 건물을 세우는 내용이 언급되므로 중수 기록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국청사 편액①과의 내용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경인(庚寅)’은 1890년(고종 27)으로 판단된다.
[의의와 평가]
국청사 소장 편액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국청사의 명칭 유래와 중수 기록, 시주질, 화주, 각수 등 조선 후기 국청사에 관한 제반 사항들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국청사의 사격(寺格)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하며, 나아가 조선 후기 사회를 조망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그 가치와 의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