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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319
한자 尹致和
영어음역 Yun Chiwha
이칭/별칭 경중(景中)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현명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해평
대표관직 동래 부사|대사간
출생 시기/일시 1821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55년 - 식년시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77년연표보기 - 동래 부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79년 7월연표보기 - 동래 부사 퇴임
활동 시기/일시 1885년 - 대사간에 임명
부임|활동지 동래부 동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56지도보기

[정의]

개항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경중(景中). 아버지는 윤좌열(尹佐烈)이다.

[활동 사항]

윤치화(尹致和)[1821~?]는 1855년(철종 6) 식년시 병과로 급제한 후 검열·정언·지평·부수찬·호조 좌랑을 거쳐 1877년(고종 14) 홍우창(洪祐昌)[1819~?]의 뒤를 이어 동래 부사로 부임하였다. 윤치화가 동래 부사로 재임하던 때는 강화도 조약의 내용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일본과 이를 저지하려는 조선 사이에 첨예한 외교전이 벌어졌던 시기다. 이때 일본 사신의 체류, 개항장 선정, 일본의 불법적인 측량 문제 등이 제기되었고, 부산에 일본의 제일국립은행 부산지점이 생겼다.

개항 이후 조일 수호 조규의 무관세 무역의 약탈성을 깨달은 정부는 부산항에 해관(海關)을 설치하여 대일 무역을 하는 조선 상인에게 세금을 징수하기로 하고, 1878년(고종 15) 8월 품목별 세율과 금수 품목을 정해 보내왔다. 이에 윤치화는 품목별 세율, 금수 품목 등을 정하여 조선 상인부터 징세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부산 주재 일본 관리 야마노시로[山之城祐長]에게 9월 3일부터 두모진(豆毛鎭)에 해관을 설치하여 세금을 걷겠다고 통보하고, 정세 책자(定稅冊子)를 보냈다. 그런데 이것이 원인이 되어 두모포 수세 거부 난동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본 관리관이 항의하고 부산에 있던 일본 상인 135명이 동래부를 찾아와 진정했으나, 윤치화는 조선 상인에 한하여 징세하는 것이니 일본 측이 항의할 이유가 없다고 단호히 거부하였다. 이에 일본 관민은 폭력 시위를 하면서 정세(停稅)를 요구했고, 격분한 주민들이 대항하여 충돌이 일어났다. 11월 일본 정부는 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와 군함을 급파하여 두모진 일대에서 시위 행군을 하며 해관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윤치화는 중앙의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면서 일본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철시(撤市)[시장이나 가게 문을 닫고 장사를 하지 않음]로 대응하였다. 이때 동래부에 난입한 일본인에 의해 윤치화와 변찰관(辨察官) 현석운(玄昔運)이 부상을 당했다.

일본의 무력시위에 놀란 정부는 징세를 중단하였고 윤치화가 일본인의 칼에 부상당한 것은 수치이며 모욕이라는 이유로 그를 파직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윤치화는 1879년(고종 16) 7월까지 동래 부사로 재직한 뒤 승지로 승진하였다. 1885년(고종 22)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보름 만에 면임되었다.

[학문과 저술]

윤치화가 올린 장계를 모은 『왜사 일기(倭使日記)』6-12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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