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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285
한자 吳仁奎
영어음역 O Ingyu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로13번길 53[초량동 393-1]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차철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경제인
성별
대표경력 부산제2금융조합 사장
출생 시기/일시 1871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국채 보상 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사립정정의숙에 20원 기부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조선인 일본 유학생 유학 경비 모금 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괴질 환자 치료소 개설
활동 시기/일시 1921년 - 북선창고주식회사 이사로 재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부산제2금융조합 사장으로 재임
1933년 - 부산제2금융조합 사장 퇴임
활동 시기/일시 1905년 5월 - 국채 보상 운동 단연 동맹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37년연표보기 - 오인규 사망
출생지 부산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지도보기
활동지 북선창고주식회사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393-1지도보기
활동지 부산제2금융조합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구 부산부 좌천정 436]

[정의]

근대 부산 출신의 경제인.

[활동 사항]

오인규(吳仁奎)[1871~1937]는 1871년에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서 태어났다. 개항기 부산의 여타 조선인 객주들과 마찬가지로 해산물 위탁업 및 환오 정미소(丸吳精米所)를 경영하였다. 해산물 위탁업은 함경도에서 생산된 해산물이 주요 거래 품목이었다. 오인규가 경영한 정미소는 1919년 자료에서도 확인될 정도로 일정 기간 운영되었다. 오인규는 이러한 경제 활동을 통해 어느 정도 재력을 축적하여, 1911년 무렵 자산 2만 6,000원으로 부산항 자산가 가운데 전체 5위를 기록하였다. 이런 활동 외에도 경제 분야에서 해산물 위탁업과 관련 있는 북선창고주식회사 이사[1921년], 1919년 설립된 부산제2금융조합 사장[1927년~1933년] 등을 역임하였으며, 1912년 구포저축주식회사의 소액 주주[2주]로도 참여하였다.

1907년 국채 보상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오인규 또한 일본인 상인들과의 경쟁에서 피해를 본 객주였기 때문에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 부산항 상무회의소를 중심으로 진행된 단연 동맹에도 참여하여 동맹금을 납부하였다. 교육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1907년 경상남도 동래부의 사립정정의숙에 20원을 기부하였다. 또한 1907년 일본에 유학한 조선인 학생 21명이 유학비 문제로 단지 혈맹(斷指血盟)을 해 고종(高宗)과 한국 정부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이들 학생들의 유학 경비 모금 운동이 일어났을 때 오인규도 부산항 상무회의소를 중심으로 동참하였다.

사회 활동과 관련해서 오인규는 1920년 8월 4일 오남근(吳南根), 정기두(鄭箕斗), 추내유(秋乃有), 어대성(魚大成) 등과 함께 부산부 방역자위단을 조직하여 부산 부윤, 경찰서장과 협의한 뒤 부산진 좌천동 수정 계곡 부근에 건물을 빌려 괴질 환자 치료소를 만들었다. 이 덕분에 조선인은 관립피병원(官立避病院)에 가지 않고도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오인규는 1937년에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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