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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어기 전말 등록』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242
한자 監董漁基顚末謄錄
영어의미역 Gamdong Eogi Jeonman Deungnok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양흥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도서
권책 1책
저술 시기/일시 1827년~1829년연표보기 - 저술
소장처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정의]

조선 후기 초량 왜관 주변에 산재한 조선 측 어기(漁基)의 경영과 관련하여 조정, 감영, 동래부 사이에 주고받은 보고와 회신 문건을 모은 책.

[형태/서지]

1책의 필사본이다. 책의 권수제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도광 팔년 무자 십일월 일 감동 어기 전말 등록(道光八年戊子十一月 日監董漁基顚末謄錄)’이라고 되어 있어 도광(道光) 8년인 1828년 11월로 시작되는 기록으로 보이나 실제 내용은 도광 7년인 1827(순조 27) 6월 24일 기록부터 시작된다. 마지막 기록은 1829년(순조 29) 3월 23일 기록이다. 현재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초량 왜관의 크고 작은 역을 담당하는 소통사(小通事)는 신분은 낮지만 그 직임은 무거웠다. 조선에서는 소통사의 처우가 너무 박하면, 그들이 초량 왜관과 밀착되어 밀무역이나 정보 누설과 같은 폐단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하였다. 일본에서는 소통사가 가지고 있는 직임이 일본에 유리하게 쓰일 수 있도록 늘 소통사에 대한 처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감동 어기 전말 등록(監董漁基顚末謄錄)』에는 소통사가 동래부에서 매월 지급받는 요태(料太) 6말 외에 소통사 지원책으로 어장(漁場), 방렴(防廉)을 경영할 수 있도록 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그런데 방렴은 소통사의 소유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부산 어민의 소유도 많았다. 그런데 초량 왜관 경계 밖에 있어야 하는 부산 어민의 방렴이 점차 초량 왜관 앞바다에까지 설치되자, 『감동 어기 전말 등록』은 이를 금지하고 경계 밖에 방렴을 설치하도록 하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부산 어민의 방렴은 초량 왜관 서남쪽의 구초량촌에서 왜관의 동남쪽 바닷가 동암 밖까지 설치되어 있었는데, 모두 초량 왜관 경계인 금표(禁票) 밖에 있었다. 그런데 어민들이 점점 금표 안으로 들어가 초량 왜관과 가까운 곳에 방렴을 설치하여 밤낮없이 서로 만나는 상황이 되었고, 서로 필요한 물화를 밀거래하는 기회로 삼았다. 이에 따라 조선의 법과 규칙이 해이해져 잠상(潛商)이 증가한다 우려하여 금표 안의 것은 철거하는 등 방렴 설치를 재정비하고자 하였다. 또한 초량 왜관과 너무 가까이에 위치한 까닭에 일본 선박의 왕래를 방해하고 있어 이런 이유로도 방렴을 정리해야 하였다.

그런데 부산 어민들의 방렴을 철거할 때 어민 방렴 사이에 있던 소통사들이 경영하는 방렴까지 철거한 것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였다. 관청에서 비축하고 있는 자금을 소통사에게 빌려 주어 식리(殖利) 사업을 하도록 하는 등의 방안들이 나왔다. 3년간의 논의 끝에 경상 감영에서 내놓은 방안은 소통사가 방렴 경영을 하는 것을 그대로 두자는 것이었다.

소통사의 방렴은 설문(設門) 안, 수문 밖에 있어 방렴에서 초량 왜관 안 사찰인 동향사(東向寺) 사이에는 서로 말이 통할 정도로 가까웠다. 소통사도 공적인 일 외에는 초량 왜관 출입을 엄격히 금하는 것이 상호간의 약조였다. 그러므로 방렴 경영을 기회로 소통사가 불법적인 교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방렴 경영은 허락하되, 소통사를 감찰하는 방안을 세웠다.

방렴에서는 매년 10월부터 3~4개월 동안 어로 행위를 하는데 이때 소통사가 초량 왜관과 밀착될 수 있었다. 때문에 이 시기 동안에는 초량 왜관 정문인 수문(守門)을 지키는 수문군관으로 하여금 기찰 군관(譏察軍官)으로 삼아 돌아가면서 소통사의 방렴을 살피도록 하였다. 밤낮없이 살펴서 서로 소통하는 폐단을 끊도록 하고 이를 절목(節目)으로 만들어 명문화하였다.

[의의와 평가]

일본에서는 17세기 중엽부터 소통사에 대한 금전 지원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동(銅)을 지급하기도 하고, 토지를 구입할 수 있는 은(銀)도 지급하였다. 소통사의 업무가 초량 왜관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어 있어 소통사가 궁핍해지면 여러 폐단이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측 역시 소통사의 이러한 지위와 직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처우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다. 『감동 어기 전말 등록』은 조선 측이 일종의 급여 외에 방렴 경영을 통해 소통사가 재정적으로 안정될 수 있도록 도모했다는 사실을 잘 알려 주고 있다.

『감동 어기 전말 등록』은 부산 출신의 소통사들의 직임의 중요성, 초량 왜관 주변에 있는 부산 어민과 소통사가 경영하는 방렴의 존재, 부산 어민과 소통사의 초량 왜관 교류, 균역청 관할 부산의 어장의 상황을 잘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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