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2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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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義魯 |
영어음역 | Mun Uino |
이칭/별칭 | 문병로(文秉魯)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손숙경 |
[정의]
조선 후기 부산 기장 지역에 살았던 향반(鄕班).
[가계]
본관은 남평(南平). 다른 이름은 문병로(文秉魯)이다. 할아버지는 문몽계(文夢啓)이고, 아버지는 문처한(文處翰)이며, 부인은 월성 김씨(月城金氏)로 김상구(金商龜)의 딸이다. 친아버지는 문국한(文國翰)이다. 기장 철마의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동래 지역 미남에서 이주해 왔다. 병자호란 이후 문여욱[1602~?]이 철마면에 자리를 잡은 후 후손들이 기장의 향반으로 세거하게 되었다.
[활동 사항]
문의노(文義魯)[1823~1888]는 27세에 향교의 장의(掌議)가 되었고, 35세에 향교 도유사(都有司)를 맡았으며, 65세에 다시 도유사를 지냈다. 기장향교의 석전제(釋奠祭)에도 헌관으로 참석하였는데, 1872년(고종 9)부터 세상을 떠난 1888년(고종 25)까지 넉 점의 석전제 관련 차첩(差帖)[임명, 해임 등의 내용이 적힌 사령장]이 남아 있다.
1856년 향청(鄕廳)[지방의 수령을 보좌하는 자문 기관. 유향소] 이별감(二別監)으로 천거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두 차례 청원서를 올려 사양하였다. 하지만 9개월 후 넉 달 동안 일별감(一別監)을 지냈다. 별감을 그만두면서 문의노는 ‘혼자서 농사를 짓는데, 별감을 맡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사임 이유를 밝혔다.
1876년 향임(鄕任)[양반들의 자치 기구인 향청의 일을 보는 사람]이 되었고, 1881년(고종 18) 59세에 철마면의 행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면상존위(面上尊位)를 맡았다. 할아버지 문몽계가 맡았던 동수(洞首)보다 조금 더 높은 직책이다. 1884년(고종 21) 보민계(補民契)의 수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문의노와 관련된 유물로는 고문서 호구 단자(戶口單子)[호주가 가족 사항을 적어 수령에게 신고하던 서류]와 차첩 등 44여 점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