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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옥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203
한자 南玉
영어음역 Nam Ok
이칭/별칭 시온(時韞),추월(秋月)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한태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의령
대표관직 수안 군수
출생 시기/일시 1722년 5월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46년 3월 - 유배
활동 시기/일시 1753년 - 정시 문과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62년 - 유배
활동 시기/일시 1763년연표보기 - 통신사 제술관으로 일본에 다녀옴
활동 시기/일시 1765년 - 수안 군수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70년 11월 - 투옥
몰년 시기/일시 1770년 11월 30일연표보기 - 남옥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95년 10월 12일 - 신원됨
추모 시기/일시 1900년 6월 12일 - 정3품 상당에 추증됨, 제사
부임|활동지 동래부 관아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지도보기

[정의]

조선 후기 통신사 제술관(製述官)으로 일본에 다녀온 문신.

[가계]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시온(時韞), 호는 추월(秋月). 의령 부원군(宜寧府院君) 충경(忠景) 남재(南在)의 13세손이자, 직제학 남간(南簡)의 11세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남계하(南季夏)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남명핵(南溟翮)이다. 남명핵이 서출(庶出)이어서 이후 자손들이 출세에 제한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성균관 진사 남석(南晳)이고, 아버지는 진사 남도혁(南道赫)이며, 어머니는 통덕랑 김추건(金秋健)의 딸이다. 형은 생원 남규(南圭)이고, 동생은 찰방을 지낸 남중(南重)이다. 첫째 부인은 1740년 19세에 홍천에서 혼인한 유채(柳綵)의 딸로, 유씨와는 사별하였으며, 두 번째 부인은 황수정(黃壽鼎)의 딸로, 아들 남려(南鑢)와 남개(南鍇)를 두었다.

[활동 사항]

남옥(南玉)[1722~1770]은 19세 때 해주로 가서 과거 공부를 하다가 가난 때문에 춘천과 강릉으로 옮겨 다녔다. 25세 때인 1746년(영조 22) 3월 과방(科榜)에서 글을 팔았다는 지경연(知經筵) 원경하(元景夏)의 진언으로 박사호(朴師灝), 신억(申嶷)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여름 풀려났다. 1753년(영조 29) 정시 문과에 병과 4등으로 급제한 후 결성 현감(結城縣監) 등을 지냈으나 1760년(영조 36) 해임되었다. 1762년(영조 38) 장헌 세자(莊獻世子)를 구명하려다 역적으로 몰린 조재호(趙載浩)의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그해 8월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힘을 써서 풀려났다.

1763년(영조 39) 서명응(徐命膺)의 추천으로 조선 통신사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이때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자세히 적어 『일관기(日觀記)』를 펴냈다. 남옥의 글재주는 임금도 인정하여 귀국 보고회 때 영조는 제일 먼저 남옥의 활약상을 물었을 정도다. 이에 정사 조엄(趙曮)은 “1682년(숙종 8) 통신사행의 홍세태(洪世泰)와 1719년(숙종 45) 통신사행의 신유한(申維翰)에 못지않은 활약을 보여 주었다”고 칭찬하였다. 남옥은 이듬해 수안 군수(遂安郡守)에 임명되었다.

1765년(영조 41) 이문제술(吏文製述)에서 수석을 하자 영의정 홍봉한은 임금에게 “남옥은 이봉환(李鳳煥), 성대중(成大中)과 함께 ‘서류(庶流) 중의 최고 인재”라고 아뢰었다. 하지만 1770년(영조 46) 최익남(崔益男)의 옥사 때 이봉환과 친하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매를 맞고 5일 만에 죽었다.

남옥의 학문 관계 및 교유 관계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재호, 홍봉한 같은 경화거족(京華巨族)의 시사(詩社)에서 활동하면서 사귄 인물, 옥사(獄事)와 관련된 인물, 통신사행 때 송별시를 건넨 인물들과 사귀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광치(金光熾)·최익남·이봉환·이정보(李鼎輔)·이민보(李敏輔)·이홍상(李鴻祥)·유경창(柳景昌)·이양정(李養鼎)·채희범(蔡希範)·어용빈(魚用賓)·박경행(朴敬行) 등이 그들이다.

[학문과 저술]

남옥은 1763년(영조 39) 조선 통신사 제술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세 권의 책을 썼다. 통신사행의 과정을 일기체로 적은 『일관기』, 통신사행 때 지은 시를 모은 『일관시초(日觀詩草)』, 일본 문사들과 나눈 창수(唱酬)[시가나 문장을 지어 서로 주고받음] 시를 모은 『일관창수(日觀唱酬)』가 그것이다. 이것들은 일본을 내왕한 사람들의 기행록을 모은 『해행총재(海行摠載)』에 실려 있지 않지만 조엄의 『해사 일기(海槎日記)』와 더불어 1763년(영조 39) 통신사행의 내용이 가장 자세하게 기록된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일관기』에는 8월 20일 동래에 내려가 10월 6일 쓰시마[對馬島]를 향해 출발할 때까지 부산에서의 체류 생활이 반영되어 있다. 부산에 머무는 동안 일행은 충렬사(忠烈祠), 영가대(永嘉臺), 해운대(海雲臺), 몰운대(沒雲臺), 정문도(鄭文道)의 묘, 태종대(太宗臺) 등을 둘러보았다. 해신제(海神祭)와 전별연(餞別宴) 등 공식 행사에 대해서도 자세히 적었다. 해신제는 제단 설치, 제사 참가자의 역할과 위치, 제물의 종류와 양, 제문의 내용, 제사 순서 등을 소개하였다. 9월 10일 열린 전별연 역시 장소, 참석자들의 좌석 위치, 음식 종류, 노래와 춤, 잔치 순서 등을 기록해 놓아 이를 토대로 행사를 재연할 수 있을 정도다.

남옥은 일본에 머물 때 2,000여 수의 시를 지어 일본인들로부터 최고의 문사라는 칭송을 들었다. 남옥의 시는 서정성이 짙고, 당송 고문(唐宋古文)을 따르는 특징을 보인다. 특히 성리학자 김창흡(金昌翕)[1653~1722]과 남송의 시인 육유(陸游)의 시풍을 좋아하여 『일관시초』에 실린 1,100여 수의 시 가운데 김창흡 작품의 운자(韻字)를 따서 지은 시가 13편 154수, 육유의 작품에서 따온 것이 28편 117수에 이른다.

[상훈과 추모]

1795년(정조 19)에 신원되고, 1900년(고종 37) 정3품 상당직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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