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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중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201
한자 元重擧
영어음역 Won Junggeo
이칭/별칭 자재(子才),현천(玄川),손암(遜菴),물천(勿川)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한태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원주
대표관직 목천 현감
출생 시기/일시 1719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50년 - 식년 사마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60년 - 장흥고 봉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63년연표보기 - 통신사 서기로 일본 방문
활동 시기/일시 1771년 - 송라 찰방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76년 - 장원서 주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89년 - 『해동읍지』 편찬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790년 - 목천 현감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790년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서울
거주|이주지 서울
수학지 서울
부임|활동지 동래부 관아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지도보기
부임|활동지 송라역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송라면
부임|활동지 목천현 - 충청남도 천안시

[정의]

조선 후기 통신사 서기로 일본에 다녀와 『승사록(乘槎錄)』을 쓴 문신.

[가계]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재(子才), 호는 현천(玄川)·손암(遜菴)·물천(勿川). 10대조 원효연(元孝然)은 세종(世宗) 조에 대사헌, 관찰사, 예조 판서 등을 역임한 문반(文班)이었으나 9대조 원맹수(元孟檖)가 무과에 급제 후 훈련관사첨중추(訓練觀事僉中樞)를 지내면서 무반(武班)으로 바뀐 듯하다. 할아버지는 원덕형(元德亨)으로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아버지 원태규(元泰揆)는 1699년(숙종 25) 사마시(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급제하여 사직령(社稷令)을 지냈다. 아들은 1796년(정조 20) 규장각 검서관(奎章閣檢書官)으로 발탁된 원유진(元有鎭)으로, 실학자 이덕무(李德懋)의 여동생과 혼인하였다.

[활동 사항]

원중거(元重擧)[1719~1790]는 무반 가문 출신으로, 홀로 공부하여 일찍이 향리에서 이름을 떨쳤다. 32세 때인 1750년(영조 26) 식년 사마시(式年司馬試)에 생원 2등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얻지 못하다가 40세가 지나서야 종8품 장흥고 봉사(長興庫奉事)에 임명되었다. 원중거는 시재(詩才)를 인정받아 성대중(成大中), 김인겸(金仁謙) 등과 함께 통신사 서기에 발탁되어 1763년(영조 39) 일본을 방문하였다. 이때 시문 창화(詩文唱和) 및 필담(筆談)을 통해 일본의 여러 문사들과 교류하면서 일본의 학술과 문예 수준을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을 섬나라 오랑캐로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된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통신사행 후에 쓴 『승사록』에는 통신사 일행이 1763년(영조 39) 7월 24일 임금을 알현하고 8월 3일 장도에 올라 이듬해 7월 8일 한양으로 돌아와서 임금에게 귀국 보고회를 하기까지의 여정이 자세히 적혀 있다. 글 중간중간에 통신사행에 대한 분석과 객관적인 평가 및 비판을 곁들인 것도 『승사록』의 특징이다. 통신사 일행은 도일(渡日)을 위해 1763년(영조 39) 8월 22일 부산에 내려가 10월 6일 출항하기 전까지, 또 1764년(영조 40) 6월 22일 부산항에 도착해 이틀 뒤 한양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부산에 체류하였다. 이때 해운대 유람, 동래 정씨 시조인 정문도(鄭文道)의 묘소 참배, 바다와 성에서 동시에 펼쳐진 불꽃놀이 등을 즐겼다. 9월 10일에 열린 전별연은 참석자의 자리 배치, 상차림, 기생의 가무 등이 자세히 묘사되어 오늘날 똑같이 재연할 수 있을 정도다.

1770년(영조 46) 종6품 송라도 찰방(松羅道察訪)에 임명되었다가 60일 만에 파직되자 선영이 있는 경기도 양평 용문산 아래로 낙향하여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농사를 지었다. 이후 원중거정조(正祖)가 등극한 1776년 김용겸(金用謙)의 추천으로 종6품 장원서 주부(掌苑暑主簿)를 맡아 이른바 ‘연암 그룹’으로 불리는 실학자들과 『해동읍지(海東邑誌)』를 편찬하였다. 1790년(정조 14) 목천 현감(木川縣監)으로 재직하던 중, 용문산 아래 물천협(勿川峽)에서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원중거의 학문적 사승(師承) 관계는 분명하지 않지만 『원주 원씨 족보(原州元氏族譜)』에 의하면 아버지 원태규는 미관말직(微官末職)에 머물렀으나 문장과 행의(行義)가 훌륭하여 노론계 사람들이 그의 의론을 존중하였다고 하니 원중거의 학문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수항(金壽恒)의 손자로 예학(禮學)과 악률(樂律)에 밝아 노론계 젊은 지식인의 영수로 떠받들어졌던 김용겸(金用謙)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원중거의 교유 관계는 박지원(朴趾源)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지식인들 곧 이덕무, 성대중,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홍대용(洪大容) 등으로 나타난다. 원중거는 신분적 제약을 비롯한 각종 울분을 풍류로 승화시킨 시인이었기에 젊은 지식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특히 통신사행의 체험이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박제가의 『정유집(貞蕤集)』, 유득공의 『냉재집(冷齋集)』 등에 잘 나타나 있다.

통신사행을 마치고 귀국한 후 사행 체험을 일기 형식의 『승사록』과 백과사전식 견문록인 『화국지(和國志)』로 써서 일본에 대한 이해와 객관적인 인식에 기여하였다. 『화국지』에는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하여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전공을 세운 고성 사람 제만춘(諸萬春)의 삶을 조명한 「제만춘전(諸萬春傳)」과 일본 어민들이 침범한 울릉도가 원래 우리 땅임을 알려 이후 울릉도에 대한 분쟁을 차단한 안용복(安龍福)의 삶을 조명한 「안용복전(安龍福傳)」이 실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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