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0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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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暹 |
영어음역 | Gyeong Seom |
이칭/별칭 | 퇴부(退夫),삼휴자(三休子),석촌(石村),칠송(七松)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지현 |
[정의]
조선 후기 회답 겸 쇄환사 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퇴부(退夫), 호는 삼휴자(三休子)·석촌(石村)·칠송(七松). 고려 공민왕 때 재상을 지낸 경복흥(慶復興)[?~1380]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조 판서에 추증된 경시성(慶時成)[1536~1595]이다.
[활동 사항]
경섬(慶暹)[1562~1620]은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1594년(선조 27) 홍문관 정자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8년(선조 31)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왜군에 지고도 승리했다고 거짓 보고를 올리자 조선 조정에서는 장수 교체를 요구하기 위해 최천건(崔天健)[1538~1617]을 진주사에 임명, 명에 파견하였다. 경섬은 이때 최천건의 종사관으로 따라갔다. 1607년(선조 40)에는 회답 겸 쇄환사 부사가 되어 정사 여우길(呂祐吉)과 일본에 건너가 포로로 잡혀간 1,340명의 백성을 데리고 왔다. 임진왜란 이후 처음 파견된 대일본 외교 사절단이었다. 이후 경섬은 삼사의 요직을 두루 거쳐 벼슬이 부제학과 호조 참판에 이르렀다.
경섬이 지은 『해사록(海槎錄)』에 따르면 통신사 일행은 1607년 2월 6일 동래부에 내려가 29일 해신제를 지낸 뒤 일본으로 건너갔고, 7월 3일 부산포에 도착하여 6일 한양으로 출발하였다. 경섬 일행은 동래부와 부산포에 머무는 동안 동래 부사 이덕온(李德溫)[1562~1635], 경상좌수사 최강(崔堈)[1559~1614] 등과 교유하면서 각 처소에서 잔치를 베풀고, 몰운대와 태종대 등 부산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왜관 및 절영도의 앞을 지나기도 하였다.
[학문과 저술]
1607년(선조 40) 회답 겸 쇄환사 부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쓴 『해사록』을 남겼다.
[묘소]
경섬의 묘는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대당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