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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076
한자 東萊邑城戰鬪
영어의미역 Battle of Dongrae-eupseong Fortres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강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투
관련인물/단체 송상현|송공단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4월 14일연표보기 - 일본군 동래 읍성 포위
종결 시기/일시 1592년 4월 15일연표보기 - 일본군 동래 읍성 점령
발단 시기/일시 1592년 4월 14일 - 일본군 동래 읍성 진격
전개 시기/일시 1592년 4월 15일 - 일본군 동래 읍성 공격
발생|시작 장소 동래 읍성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복천동·칠산동·안락동 일원
종결 장소 동래 읍성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복천동·칠산동·안락동 일원

[정의]

임진왜란 때 부산 동래 읍성에서 벌어진 전투.

[개설]

동래 읍성 전투는 임진왜란 때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의 군사와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사가 동래 읍성에서 싸운 전투이다. 부산진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4월 14일 오후 동래로 진격하였다. 동래 부사 송상현과 군·관·민은 격렬하게 항쟁하였지만, 일본군의 대군을 이겨내지 못하고 동래 읍성이 함락되었다. 일본군은 동래부의 중심을 점령함으로써 조선에 확실한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동래부민은 대부분 전사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역사적 배경]

1592년 4월 14일 오전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동래로 진출하였다. 당시 동래는 부산진과 가까운 거리였고, 또 부산의 행정 관할은 동래부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움직임은 곧 동래에 알려졌다. 동래 부사는 문관 출신의 송상현으로 난이 일어나기 1년 전에 부임하여 대비를 하고 있었다.

송상현 부사는 성을 방어하기 위해, 일차적으로는 지역 군사권을 가지고 있던 경상좌도 병사의 군과 인근 군현 군사의 힘을 빌어서 싸울 예정이었다. 경상좌도 병사 이각(李珏)은 일본 침입의 급보를 울산의 좌병영에서 받고 휘하 사졸을 데리고 동래부로 달려갔다. 이때 동래부의 인접 고을인 양산과 울산의 군수도 약간의 병력을 이끌고 동래성에 집결하여 동래 부사 송상현과 함께 방어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경상좌도 병사 이각은 동래 읍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도망하였다. 그리고 직접 부사의 명령 계통은 아니지만, 부산 해안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인근의 경상좌수영의 수사(水使) 박홍(朴泓)부산포에 적의 대군이 밀어 닥치자 재빨리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따라서 동래 읍성은 송상현 부사가 남긴 「고성월훈 열진고침(孤城月暈列陣高枕)」이란 시와 같이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다만 양산 군수 조영규(趙英珪)와 울산 군수 이언성(李彦誠), 조방장(助防將) 홍윤관(洪允寬)이 부사 송상현과 함께 군민을 지휘하며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경과]

동래 읍성에 일본군이 침입한 것은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14일로 일본군은 여세를 몰아 내침하여 포위하고, 15일에 주력 부대가 공격을 개시하여 전투를 펼쳤다. 먼저 일부의 일본군은 본격적인 공격에 앞서 취병장(聚兵場)에 집결하고는 100여 명의 군사로 하여금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내놓아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고 쓴 목패를 남문 밖에 세워 동래 읍성 군민들의 항복을 촉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갔다. 그 표본을 본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死易假道難]’는 글을 쓴 목패를 적중에 던져 단호한 항전 의지를 표시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3개 대(隊)로 나누어 한 대는 황령산 기슭부터, 한 대는 서편 대로로부터, 또 한 대는 취병장으로부터 바로 남문으로 향하여 날이 저물기 전에 세 겹으로 성을 포위하였다. 14일 밤은 적의 포위 속에 살기가 등등한 가운데 지새웠다. 이에 일본군은 동래 읍성에 대한 항복 권유를 포기하고, 15일 마침내 전면 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은 동·서·남 세 방면에서 조총을 난사하면서 성을 넘으려 하였다. 조선군은 사력을 다해 응전하였으며, 송상현은 남문루에서 지휘하였다. 남문에서 쌍방이 사력을 다해 격전을 벌였으나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이에 적은 뒷산인 동북쪽 산의 경사진 산복의 성벽을 파괴하고 그 곳으로 성난 파도와 같이 침입해 들어왔다. 순식간에 성내는 대혼란 속에서 한동안 아비규환의 대접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는 일본군의 제1군의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직접 전투하였으므로, 병력의 규모가 많았다.

많은 군사에 맞서 조선의 군졸뿐만 아니라 민중들도 싸웠다.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저항이 전개되었다. 무기를 갖지 못한 성민들은 혹은 도수로 적에 부딪치고, 혹은 막대기를 휘두르며, 혹은 괭이, 낫, 도끼 등 손에 잡히는 대로 가지고 싸웠으며, 심지어는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거두어 적을 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많은 적의 대군에 당해낼 수가 없었다. 대세는 시시각각 조선 측에 불리해 갔다. 마침내 송상현이 일본군에게 포위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동래부는 부산진보다 큰 고을이었고, 부사가 소임을 맡고 있는 지체 높은 고장이었다. 때문에 일본군은 이미 부산진성 전투에서 조선 민의 굳센 항전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대군을 동원하여 일시에 동래성을 공략하려고 하여 일대 격전을 치렀다. 이에 동래 읍성 전투는 15일의 경우 시간적으로 보면 부산진성 전투보다 전투 시간이 짧았다.

[결과]

대세는 시시각각 조선 측에 불리하였다. 마침내 송상현이 일본군에게 포위되었다. 송상현 부사는 죽을 각오를 보이며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조복(朝服)을 가지고 오게 하여 갑옷 위에 입고 의연한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호상에서 내려 북향 사배하고는 붓을 잡아 부채에 “외로운 성에는 달이 흐려지고 다른 성진(城陳)은 지척이 없다. 군신의 의가 무거우니 부자의 은정(恩情)은 가벼우리까”라고 글을 써서 사람을 시켜 부모님께 하직의 인사를 보내었다.

이윽고 적병은 송상현이 굴하지 않을 것을 알고 칼을 들어 살해하였다. 이때 부사 주위에는 군관(軍官) 송봉수(宋鳳壽), 향리 대송백(大宋伯), 관노비 매동(邁同) 등이 좌우에 서 있었는데, 적병들이 앞으로 다가오자 격투 끝에 송상현 부사 등은 전사하였으며, 부사를 도우려 왔던 양산 군수 조영규 등 군민 다수도 차례로 전사하였다. 부민으로 죽은 자는 박상(朴祥)과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이촌녀(二村女) 등이 전한다.

대격전은 조선 측에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당시 군민이 전사한 상황은 『조공 유사기(趙公遺事記)』에 “조 군수의 아들 조정로(趙廷老)가 부친의 유해를 찾으려 동래성에 가 본 즉 가득히 시체가 쌓였으니, 부친의 유골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 글에 나타난다.

임진왜란 17년 후 동래 부사로 온 이안눌(李安訥)의 「동래 맹하 유감(東萊孟夏有感)」이란 시 중에 잘 나타난다. 즉 4월 14일 저녁에 집집마다 곡소리가 일어나 늙은 향리에게 물으니, “바로 이 날이 임진년 성이 함락된 날이란 것이었다. 당시 송 부사를 좇아 성중에 모였던 지방민들은 같은 시간에 피바다로 변하고 쌓인 시체 밑에 투신하여 생존자는 천백 명 중에 한두 명 정도였으며, 조손 부모 부부 자매 간에 무릇 생존한 자는 이 날에 죽은 친족을 제사하고 통곡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니, 늙은 향리는 다시 말하기를, “곡해 주는 사람이 있는 것은 슬프기가 덜한 것이니, 휘두르는 적의 백도(白刀) 아래 온 가족이 다 죽어서 곡해 줄 사람조차 남기지 못한 집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의의와 평가]

일본군의 대군에 맞서 동래 읍성의 군·관·민이 하나가 되어 결사 항전하여 일본군에 대한 항전의 굳은 의지를 드러냈다. 동래 읍성이 함락될 때 각지로 흩어진 동래부민들은 일본군의 잔학상을 알려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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