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0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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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西平浦鎭 |
영어의미역 | Seobyeongpo-ji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부산광역시 사하구 구평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진상원 |
[정의]
조선 시대 서평포에 있던 진영(鎭營).
[제정 경위 및 목적]
1510년(중종 5) 삼포 왜란에 이어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이 발생한 후 국방 체제 개편의 필요성이 증대하여 진관제(鎭管制)를 개편할 때 서평포(西平浦)에 진(鎭)이 설치되었다.
[관련 기록]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에 관련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
지금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구평동에 해당하는 서평포진은 조선 전기 세종 때까지도 부산진(釜山鎭)에 속한 아주 작은 요새에 지나지 않았다. 이웃에 있는 다대포(多大浦)에는 정3품인 수군첨절제사가 임명된 데 비하여 서평포의 우두머리는 종9품의 권관(權官)이 지휘를 맡았다. 16세기 중종 연간 삼포 왜란에 이어 을묘왜변이 발생한 후 국방 수비 강화의 필요성이 증대하면서 서평포에 성을 새로 쌓고 비로소 진(鎭)을 설치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진을 함락한 왜병들의 일부가 곧바로 서평포로 몰려와 성을 무너뜨렸다. 임진왜란 후에는 성이 사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허물어졌기 때문에 다대포진(多大浦鎭)의 성안으로 이전하였다가, 1668년(현종 9) 원 위치로 돌아왔다. 그리고 1677년(숙종 3) 무관 종4품인 만호가 지휘하는 부대로 승격하였다. 만호 밑에 군관(軍官) 8명, 진리(鎭吏) 6명, 지인(知印) 3명, 사령(使令) 2명을 두었다. 그리고 전선(戰船) 1척, 병선(兵船) 1척, 사후선(伺候船) 2척에 수군(水軍) 1,081명과 무학 사부(武學射夫) 118명이 있었다. 이 밖에 배를 만드는 데 필요한 목재를 공급할 수 있도록 벌목을 금하는 봉산(封山) 1개소를 가지고 있었다.
서평포에는 최근까지도 토성이 남아 있었다. 여기에서 신라의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보면 아마도 이곳은 신라 시대부터 군사 요지로서 성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의의와 평가]
서평포진은 왜관(倭館)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으며, 동북으로 감내포(甘內浦)[대포만(大浦灣)]와 마주보고 있고, 서쪽으로는 다대포와 이웃하고 있어 조선 시대의 주요 군사 요충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