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0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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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英雨 |
영어음역 | Yi Yeongu |
분야 | 종교/불교,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인물/종교인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미숙 |
[정의]
1919년 부산 범어사 3·1 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영우(李英雨)[1899~1937]는 1899년 3월 경상남도 양산군 웅상면 덕계리[현 경상남도 양산시 덕계동]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불교에 귀의하여 범어사의 명정학교[현 청룡초등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범어사 지방학림에 재학 중이었다. 이때 부산에서도 범어사의 승려와 학생 등 7명이 서울로 가서 3·1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들이 돌아와 명정학교와 범어사 지방학림을 중심으로 범어사 3·1 운동을 계획할 때 이영우도 적극 참여할 것을 결의하였다. 애초 이들은 동래 장날인 3월 18일에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그러나 명정학교 학생 오계운이 이러한 사실을 누설하였기 때문에, 3워 18일 새벽 동래구 복천동의 범어사 동래포교당에서 주모자 상당수가 체포되었다.
하지만 이영우를 비롯하여 검거를 피한 40여 명의 명정학교와 범어사 지방학림 학생은 3월 18일 밤 동래읍 서문 근방에서부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동래 시장을 거쳐 동래읍 남문까지 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19일에도 이들은 동래 시장 일대에서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격문을 뿌리고 만세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때 이영우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 받고 부산감옥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동양대학(東洋大學)에서 철학을 공부하였다.
졸업 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서 상해 임시 정부에서 5개월간 종사하다가, 중요한 연락 의무를 띠고 귀국하여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잠시 울산 서생면의 사립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중 다시 연행되기도 하였다. 이후 교직을 그만두고 범어사로 돌아와 종무소 법무(法務)의 소임을 맡고 있던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1937년 병사하였다. 향년 37세였다.
[상훈과 추모]
1970년 금정중학교 교정에 세운 ‘범어사 3·1 운동 유공비’와 1995년 금정구 구서1동 동래여자고등학교 앞에 세운 ‘범어사 3·1 운동 유공비’에 이름이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