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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042
한자 吳炳俊
영어음역 Oh Byeongju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정미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출생 시기/일시 1897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범어사 3·1 운동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부산감옥소 수감
활동 시기/일시 1943년 4월 - 동래경찰서에 구금
활동 시기/일시 1945년 2월 - 북부산경찰서에 구금
몰년 시기/일시 1966년 5월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0년 - 범어사 3·1 운동 유공비 건립[1970]
추모 시기/일시 1995년 - 범어사 3·1 운동 유공비 건립[1995]
출생지 부산광역시 금정구 노포동
활동지 부산감옥소 -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
활동지 범어사 -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지도보기
기념물 범어사 3·1 운동 유공비[1970] - 부산광역시 금정구 남산동 385 금정중학교지도보기
기념물 범어사 3·1 운동 유공비[1995] - 부산시 금정구 구서1동[동래여고 앞]

[정의]

1919년에 부산 범어사 3·1 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오병준(吳炳俊)[1897~1966]은 1897년 부산광역시 금정구 노포동에서 태어났다. 절에 들어가 공부하기를 바란 오병준은 부모의 승낙을 받아 범어사에 입산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범어사 명정학교범어사 지방학림의 재학생과 졸업생 7명이 서울로 가서 3·1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들이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오자, 범어사 3·1 운동이 계획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오병준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애초 이들은 동래 장날인 3월 18일에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그러나 명정학교 학생인 오계운의 발고로 3월 18일 새벽 동래구 복천동범어사 동래포교당에서 주모자 상당수가 체포되었다.

하지만 오병준을 비롯하여 검거를 피한 40여 명의 명정학교와 지방학림 학생들은 3월 18일 밤 동래읍 서문 근방에서부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동래 시장을 거쳐 동래읍 남문까지 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19일에도 동래 시장 일대에서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격문을 뿌리고 만세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때 시위 학생들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부산감옥소에 투옥되었고, 오병준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 받고 복역하였다. 출옥 후 오병준범어사 명정학교[현 청룡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에도 오병준은 1943년 4월 동래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고, 1944년 5월과 1945년 2월에는 북부산경찰서에 구금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그동안 오병준범어사 종무소의 일을 보기도 하였으나, 1966년 5월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1970년 금정중학교 교정에 세운 ‘범어사 3·1운동 유공비’와 1995년 금정구 구서1동 동래여자고등학교 앞에 세운 ‘범어사 3·1운동 유공비’에 이름이 새겨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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