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0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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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盧蓋邦 |
영어음역 | No Gaebang |
이칭/별칭 | 유한(維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239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보정 |
[정의]
임진왜란 때 동래성에서 순절한 문신.
[가계]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유한(維翰). 아버지는 노일(盧馹)이라고 전한다. 부인은 여흥 이씨(驪興李氏)로 이경옥(李慶沃)의 딸이다.
[활동 사항]
노개방(盧蓋邦)[1563~1592]은 경상북도 밀양시 무안면 가례리 서가정에서 태어났다. 1588년(선조 21) 식년시 병과(丙科)에 24위로 급제하였다. 고향인 밀양과 가까운 곳에서 근무하기 위해 자청하여 동래부(東萊府)의 교수(敎授)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봄 부모를 뵈러 밀양에 가 있던 중 왜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동래읍성의 「남문비기(南門碑記)」에 따르면 노개방은 동래성이 왜군에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밀양에서 급히 돌아와 동래향교로 달려갔으나 동래향교에 봉안되어 있던 위패들은 이미 동래성 정원루(靖遠樓)로 옮겨진 후였다. 이에 노개방은 정원루로 가 위패 앞에 예를 올린 뒤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항거하였다. 이윽고 동래성이 함락되자 노개방은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부인 여흥 이씨도 밀양에서 자결하였다.
[상훈과 추모]
사후 동래성에서 항전하다가 순절한 동래 부사 송상현을 비롯하여 여러 충신들의 충정을 기리고자 세워진 옛 송공단(宋公壇) 터에서 1709년(숙종 35)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다가 1736년(영조 12) 동래의 충렬사(忠烈祠)로 옮겨 배향되었다. 1742년 현재의 송공단이 세워지면서 노개방은 북쪽 제단에 배향되고, 그의 부인인 여흥 이씨는 서쪽 제단에 배향되었다. 또한 도승지(都承旨)로 추증되고, 그의 공적을 기리고자 송공단에 노개방 순난비(盧蓋邦殉難碑)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