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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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基俊 |
영어음역 | Baek Gijun |
이칭/별칭 | 운계(雲溪)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중앙로24번길 6[대청동 2가 38]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서용태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에 거주한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수원. 호는 운계(雲湲). 아버지는 백선문(白善文)이다.
[활동사항]
백기준(白基俊)[1887~1974]은 1887년(고종 24) 11월 10일에 평안북도 의주군 비연면 홍의동 245번지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 당시의 주소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2가 38번지이다. 백기준은 19세인 1905년 5월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법률을 공부하던 중 11월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분을 견디지 못하고 의병에 참여하려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일제의 기밀을 알아내 의병대에 알릴 셈으로 경찰에 투신하였으나 이마저 여의치 못하여 3개월 만에 자진 사퇴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 경찰의 주요 시찰 인물로 주목을 받았다.
백기준은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이후에 중국 둥베이[東北]로 건너가 항일 무장 투쟁 단체인 대한독립단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7월 대한독립단 총본부와 대한민국 임시 정부 평북독판부로부터 국내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백의범(白義範)·김승학(金承學)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주요 임무는 평안북도 지역에 연통제와 대한독립단 지부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맹렬하게 활동하여 용천·의주 등 서북 지방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청년들을 포섭하여 독립운동 대열에 동참하게 하였다. 또한 거액의 군자금을 모아 대한독립단 본부로 돌아가 나누어 주었고, 임시 정부에도 송금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19년 말 연호 문제를 둘러싸고 대한독립단이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과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으로 양분되자, 백기준은 공화주의와 민국 연호의 사용을 주장하는 민국독립단에 가담하였으며 1920년 총무부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백기준은 광복군 참의부의 참사(參事)에 임명되었고, 독립운동 기관이 임시 정부 군무부(軍務部) 직할로 흡수되어 광복군사령부로 정비되자 재무사장(財務司長)에 선임되었다.
백기준은 1921년 상하이[上海]로 가서 상해 임시 정부의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입법 활동을 하였고, 재정난을 겪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의 발송부장을 맡아 운영 자금 모집과 발간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2년에 상해 임시 정부 국무원 비서장대리에 선임되었으며, 한·중 양 국민의 친선을 도모하고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에 가입하여 간사로 활동하였다. 1923년 10월 24일 교민단(僑民團) 제4회 의원총선거에서 본구의원(本區議員)으로 당선되었다.
백기준은 국민 대표자 회의 이후 1924년 내몽고 지역으로 가서 의민부(義民府)를 조직하고 총무부장이 되었으나, 곧 상하이로 돌아와 상해 임시 정부 국무원 비서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에는 국무원 비서국장으로 선임되었고, 안창호(安昌浩)·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결성에 참여했으며, 기관지 『한보(韓報)』를 발간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 훙커우 공원[虹口公園] 의거 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산둥성[山東省] 칭다오[靑島]로 가서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백기준은 1974년 2월 26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국민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