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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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溫井改建碑 |
영어의미역 | Stone Monument for Cherishing the Achievement of Renovating a Hot Spri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금강로124번길 23-17[온천동 135-2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재혁 |
[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있는, 조선 후기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가 동래 온천을 수축한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개설]
동래 온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신라의 재상이던 충원공(忠元公)이 이곳에 와서 온정(溫井)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갔다”라는 내용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온정은 부의 북쪽 5리에 있는데 그 열이 달걀을 익힐 만하고 병자가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 문득 나아, 신라 시대에는 왕이 여러 번 이곳에 행차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617년(광해군 9) 이곳에 와서 목욕을 한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에서 당시 온정의 모습과 온천수에 대해 “샘의 안팎에 석감이 있는데, …… 하나의 감에 5~6명이 들어갈 수 있고, 샘물은 위쪽 백공(百孔)에서 흘러나오는데 물이 매우 뜨거워 갑자기 손발을 넣을 수가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으로 본다면 당시의 온정은 내외 두 석조(石槽)에 10여 명 정도가 목욕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이었고, 수온이 매우 높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691년(숙종 17) 동래부사 김홍복(金洪福)은 새로운 천원(泉源)을 파고 온정 옆에는 행랑 5칸이 딸린 7칸 규모의 온정가라는 관공서를 세워 온정직이라는 관리를 배치하였다. 그 후 강필리에 의해 1765년(영조 41) 새로 지어진 온정은 “돌로 두 개의 탕을 만들고 아홉 칸의 욕사를 지었는데, 남탕과 여탕을 구분하고 지붕을 덮었다”라고 되어 있다. 이 온정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1878년(고종 15)에는 처음으로 일본인 전용 목욕탕이 생기고, 1898년(고종 35)에는 일본인이 위탁 운영하는 여관이 생겼다. 일제 강점기에는 온천장도 일본인이 실권을 장악하여 한국인은 이권을 박탈당한 채 지내야 하였다.
[건립 경위]
온정개건비(溫井改建碑)는 1766년 10월 동래부사 강필리가 온정[온천]을 대대적으로 수축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위치]
온정개건비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135-26번지 용각(龍閣) 내에 있다. 온천장과 야외 족욕장 및 온천1동 새마을 금고와 인접해 있다. 인근에 녹천 호텔, 허심청 등 온천이 밀집해 있다.
[형태]
비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기단과 비신(碑身)[몸돌]으로 구성되어 있다. 머리 부분은 반달 모양이 아니라 각이 지게 깎았다. 비의 크기는 높이 144㎝, 너비 61㎝이다.
[금석문]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온정은 읍 북쪽 5리에 있는데 금정산에서 발원한다. 탕에 들어가 목욕을 하면 온갖 질병이 낫는다. 옛날 비석은 마모되어서 징거(徵據)할 수 없다. 강희 신미년에 돌로 두 개의 탕을 만들고 건물로 덮었는데, 건물이 낡아져 탕이 막혀 버렸다. 강필리 공은 나라의 어려움을 치료하는 솜씨로 동래의 백성을 소생시켜 일곱 가지 일을 밝히고 백 가지 폐한 것을 부흥시켰는데, 이에 온정을 다스려서 감관에게 명령하여 고쳐 짓도록 하였다.
동쪽 옛터로 내려가 유좌를 고쳐 임좌로 앉히고 도성의 석재를 빼 와서 7월 상현에 터를 닦아 8월 24일에 기둥을 세우고 9월 7일에 상량을 하였다. 무릇 9칸이나 되는데, 남탕과 여탕을 구분하였으니 상쾌하고 화려하여 마치 꿩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지키는 집을 짓고 대문을 만들었으며 안에는 비를 세웠다. 아! 강공이 아니면 이 온정은 없었을 것이고, 감관이 아니면 이 건물은 없었을 것이다. 명(銘)을 지어 말한다. 공께서 고을을 다스리니 백성들이 이에 힘입어 잘살게 되고 공께서 온정을 수리하니 사람들이 질병이 없게 되었다. 천만 년 동안 입으로 비석을 전하라. 성상 42년 병술년 10월 보름 여산 송광적이 쓰다[井在治北五里 源金井引 入湯浴之瘳百疾 古碑剝罔徵 康熙辛未 石作兩湯覆以屋 屋老湯陻 姜公必履以醫國手 甦萊民 明七事 興百廢 爰相治井 命監改作 迤東故地 易酉坐壬 寫島城材 以七月上弦基 八月卄四柱 九月初七梁 凡九間區男女湯 爽麗如翬飛 作守家 立大門內樹碑 噫 微公無此井 微監無此舍 銘曰 公治邑 民賴活 公修井 人無疾 千萬古 口又碣 聖上 四十二年 丙戌 十月 望 麗山 宋光迪 書].”
[의의와 평가]
온정개건비는 동래 온천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