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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현주 필 산수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575
한자 洪顯周 筆 山水圖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서화류
지역 부산광역시 서구 구덕로 225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원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20년 7월 29일연표보기 - 홍현주 필 산수도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13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홍현주 필 산수도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재지정
성격 회화
서체/기법 종이에 수묵담채
문화재 지정번호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정의]

조선 정조의 부마 홍현주(洪顯周)가 그린 산수화.

[개설]

홍현주 필 산수도 1점은 동아대학교 초빙교수를 역임한 동양사학의 태두인 동빈(東濱) 김상기(金庠基)[1901~1977) 박사가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에 기증한 유물 중 한 점이다. 화첩(畫帖)에서 떨어져 나온 1폭으로, 1970년대부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대표작으로 손꼽혀 비교적 잘 알려진 그림이다. 화면 상단에 다산(茶山) 정약용의 제시(題詩)가 있어 1982년 간행된 『산수화』(하)[중앙일보사, 도판156]에 다산의 그림으로 게재되었다.

그러나 화첩에서 산락(散落)되어 나뉘어 애장(愛藏)되던 작품들이 하나둘 공개되어 이를 그린 화가가 홍현주로 밝혀졌다. 화면 아래 왼쪽 모서리에 있는 주문방인(白文方印) ‘현주사인(顯周私印)’은 소장인(所藏印)으로 보기 쉬워, 그린 화가 자신의 도장임을 간과한 것이다. 수장가 내지 차인(茶人)으로서 면모나 그의 차시(茶詩) 등 문학에 대한 조명은 이루어졌다. 일련의 그림들을 통해 회화사에서 가려진 또 한 사람의 문인화가(文人畵家)가 새롭게 발굴되었다. 홍현주의 유작 중 문인화로 격조(格調) 면에서 단연 두드러져 그의 대표작(代表作)으로 제시되는 그림이다.

[작가]

문장으로 크게 이름을 얻은 명문자제 홍현주(洪顯周)[1793~1865]는 정조(正祖)[1752~1800)의 부마가 되어 영명위(永明尉)에 봉해졌다. 척족(戚族)은 관계 진출에 제한되는 요소로 서화에 잠심(潛心), 문학 등 학예(學藝)와 및 서화수장가로 삶을 길을 걷게 한 배경이다. 당대 정약용ㆍ김정희(金正喜)[1786~1856]ㆍ초의(艸衣)[1786~1866]ㆍ이조묵(李祖黙)[1792~1840]ㆍ이상적(李尙迪)[1804~1865] 등과 중국의 문인들과 교류를 전하는 간찰과 시문, 그림에 부친 제시 등이 전한다. 문학 측면에서 어느 정도 연구 성과가 있다.

홍현주의 호는 해거재(海居齋), 약헌(約軒) 등이 알려져 있다. 12세에 결혼한 부인 숙선옹주(淑善翁主)[1793~1836])는 정조와 수빈박씨(綏嬪朴氏)[1770~1822] 사이서 태어난 외동딸로 동갑이며, 순조(純祖)[1790~1834]의 친동생이다. 홍현주 부부의 무덤은 경기도 지역 개발에 따른 이장(移葬) 과정에서 이금(泥金)으로 망자의 이름이 선명한 옻칠 입한 목관 내 매듭 달린 향낭(香囊)과 장신구 등 부장품(副葬品)이 출토되어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었다.

홍현주의 가계를 살피면 먼저 조부 항재(恒齋) 홍낙성(洪樂性)[1718~1798]은 이조판서ㆍ병조판서ㆍ형조판서 역임 후 좌우정을 거쳐 영의정에 추증된 바 단아한 외모를 보이는 초상이 여러 점 전한다. 부친 족수거사(足睡居士) 홍인모(洪仁謨)[1755~1812]는 우부승지를 역임했으며 적지 아니한 시문(詩文)과 저술을 남긴 학자였다. 슬하 자녀는 두 딸에 띠 동갑인 첫째와 둘째, 막내 홍현주 등 3형제를 두었다. 큰형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1774~1842]는 조선 제24대 헌종(憲宗)[1827~1849]의 사부로 이조판서와 좌우정을 역임했다. 작은 형 항해(沆瀣) 홍길주(洪吉周)[1786~1841]는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이들 형제들에 있어 부친의 훈도(薰陶)와, 문장가로 이름 난 모친 서영수합(徐令壽閤)[1753~1823]의 영향은 컸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녀의 외조부가 농암 김창업(金昌業)[1648~1722]이다.

이들 형제들의 서화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의 하나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단원유묵첩(檀園遺墨帖)』을 들게 된다. 단원이 아들에게 준 편지로 김홍도(金弘道)[1745~1806 경]가 태어난 해가 1745년임을 알려준 이 첩은 ‘조선의 화선(畫仙)’ 김홍도 타계 후 외아들 김양기(金良驥)[1792 경~1842 이전]가 선친의 유묵인 서간(書簡)과 당호(堂號), 왕탁(王鐸)[1592~1652] 등의 시를 모아 성첩한 서첩(書帖)이다. 첩의 서문은 홍석주와 신위(申緯)[1769~1847]가 섰고, 말미에 홍길주와 홍현주 등 5인의 발문이 있으니, 홍씨 3형제 글이 모두 들어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홍현주 유작은 산수가 주류(主流)이나 묵란과 묵죽 등 사군자와 어해에 이르는 여러 장르에 걸쳐 미공개까지 포함해 20여 점에 이른다. 예외 없이 화면 내 작가를 알려주는 도장이나 제사가 있다. 매 폭 각기 이름과 자 또는 그리고 직위를 알려주는 주문방인[江山煙雲洪顯周ㆍ海居人], 백문방인[約軒ㆍ駙馬都尉ㆍ洪顯周ㆍ顯周私印] 등이 화면 좌우 모서리에 찍혀 있다.

홍현주의 그림이 세상에서 처음 빛 보게 된 것은 간송미술관에서 1983년 봄 개최한 ‘추사묵연’ 기획전에 출품한 「진인은서(眞人隱棲)」와 「산방독서(山房讀書)」두 작품이다(『간송문화』24, 도판 32,33). 후자는 2008년 가을 ‘보화각 설립 70주년 기념서화’에도 출품되었다. 이 둘은 한 화첩에 속한 것들로 비록 소품으로 여기화가로 이나 그림에 조예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처 소장품으로 2001년 봄 간송미술관에서 개최한 제60회 기획전인 ‘추사와 그 학파’에 출품된 「월야청흥(月夜淸興)」과 「시화중인(詩畫中人)」, 그리고 「묵란」 등 5점이 공개되었다. 「시화중인」과 「묵란」둘은 같은 크기로 다른 제2의 화첩이다. 간송미술관에는 이들 외에 홍현주의 유작이 더 있다.

「월야청흥」에는 같은 화첩에 포함된 3점이 홍현주 그림임을 밝힌 다산 서풍(書風)의 제사(題詞)가 있다. 그러나 공개된 5점 중 3점엔 다산의 제시가 없다. 손창근(孫昌根) 기증품인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벽와귀로(碧瓦歸路)」와 「조어(藻魚)」, 손창근이 서강대학교에 기증한 「구리입정(九里笠亭)」, 개인소장인 「초안소정(草岸小亭)」과 동아대학교 소장 「산수도」등 5점엔 화면 내 다산의 제시(題詩)가 있다. 이들 5점은 장황을 바꿀 때 나타나는 오차(誤差) 범위의 크기로 같은 화첩에 속한 것으로 사료된다. 월전미술관 소장 「묵죽」은 크기의 차이로 또 다른 화첩에 속한 그림으로 적어도 화첩이 3첩(帖) 이상 제작한 것으로, 차후 발굴을 기대하게 된다.

2012년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아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개최한 ‘정약용250 - 천명, 다산의 하늘’[2012.6.16~7.22.]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연 ‘ 하늘을 받들어 백성을 보듬다 다산 정약용’[2012.10.30~12.16.]을 통해 다산의 제시가 있는 그림들이 각기 3점씩 출품되었다. 그러나 이들 전시 때 작품 설명카드나, 전시도록에 작가를 밝히지 않고 다만 전자는 3점의 산수 모두 ‘정약용 제 「열상산수도(冽上山水圖)」’란 같은 명칭으로, 후자는 ‘정약용이 시를 써넣은 물고기[산수] 그림’으로 명기했을 뿐 이를 그린 화가에 대해선 언급을 피했다. 『다산시문선』에도 언급된 ‘영명위의 화첩에 절구 네 수를 쓰다[題永明尉畫帖四絶句]’에 실린 그림도 있어 이들 11점 모두는 홍현주 유작이 분명하다.

[특징]

홍현주 필 산수도는「잔산잉수(殘山剩水)」로도 불린다. 화면 왼쪽 하단 모서리의 백문방인 '현주사인(顯周私印)'이 있고 화면 좌측에 무게를 둔 대각선 구도로 매우 간략한 구성에 수묵 위주이되 나뭇잎과 원산(遠山)에 담청, 두 나무 중 하나만 담황(淡黃)을 입혔다. 칠언절구(七言絶句)는 오른쪽 상단 빈 공간을 점하고 있는데 4행 모두 같은 글자 수이나 늘어진 버드나무 줄기들처럼 써내려가 길이를 달리해 공간에 리듬감을 준 다산의 미감(美感)이 돋보인다. 이 같이 ‘열초(洌樵)’로 관지(款識)한 다산의 제시가 있는 그림은 전술한 5점이다. 이 중 2폭은 『다산시문집』 내 실려 있으나 이들 5점의 제시들이 서풍(書風)에서 다소 차이를 보여 5점 모두에 다산이 직접 쓴 것인가에 이견(異見)이 없지 않다. 이 그림 내 시와 문집을 비교하니 2자가 다르다. 비슷한 내용이나 다른 한 글자는 1과 20으로 큰 차이나 그림 내용을 살필 때 문집 것이 옳은 것으로 사료된다.

그의 그림은 먹이 중심으로 최소한의 담황과 담청을 더한 수묵담채 위주의 해맑고 담박(淡泊)을 기저로 한 명징(明澄)한 문인화의 정수(精髓)를 엿볼 수 있다. 남종문인화풍의 정형산수(山水)의 비중이 가장 크다 하겠다. 이들 작품을 통해서도 문인화가로의 진면이 드러난다.

다산이 홍현주 그림에 부친 제시가 결정적인 자료가 됨은 자명한 사실이다. 아들보다도 연하인 그에 쏟은 다산의 애정은 단지 부마란 지위 때문이 아니라 그의 예술적 자질, 그림 됨됨이에서 그 이유를 찾음이 옳을 듯하다. 다산의 제시에 의해 홍현주의 그림은 성가(聲價)를 더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2020년 7월 29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1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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