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5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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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主簿 肖像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서화류 |
지역 | 부산광역시 영도구 해양로 301번길 4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현주 |
[정의]
부산광역시 영도구 해양로 301번길 45 국립해양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박재창의 제사(題辭)가 기록된 주부(主簿) 박위보(偉甫)의 초상화.
[개설]
대마도의 인위조린(仁位朝隣)이 부산 초량에서 만난 의원 종6품 주부(主簿) 박위보(朴偉甫)를 잊지 못해 그린 초상화로, 1713년 64세의 나이로 왜학 역관 문위행(問慰行)으로 대마도를 다녀온 박재창(朴再昌, 1649∼1720년)의 제사(題辭)가 기록되어 있다.
[형태 및 구성]
화면 중앙에는 좌정한 박주부의 모습을 좌안 7분면의 형태로 묘사하고 있으며, 화면 위쪽에는 자(字)가 도경(道卿)인 박재창의 제사가 기록되어 있다.
의 인물은 흉배(胸背)가 달린 관복과 비슷한 옷을 입고 품대(品帶)를 차고 있어서 마치 조선이나 명(明)의 관복(官服)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품계를 나타내는 흉배의 공작 같은 문양이나 종6품 주부가 찰 수 없는 금대(金帶)와 그 문양은 법식에 어긋나 있어서 정확한 이해를 갖고 그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림에 적힌 제사와 끝에 찍힌 인장은 그림에 담긴 사연과 시기 등에 대한 단서를 품고 있다. 제사를 쓴 박재창은 1713년 예조에서 대마도를 지배하는 다이묘[大名]에게 보내는 사절단, 즉 문위행의 일본어 통역관의 수장 당상역관(堂上譯官)으로 참여하였다.
[박주부 초상(朴主簿 肖像) 제사]
"余於癸巳秋奉命于朝, 來寓對州賓館矣.
有日本人以畵像簇子示之, 筆法淋離生氣滿紙.
問是誰人之像歟,
曰曾於草梁 訓噵家逢着醫士朴主簿,
累日受業, 多有所進師弟之情,
寤寐未忘, 而更難於親煮
故畵其生像. 朝暮獻酌云,
余聞之嗟嘆曰 世間豈有如此至誠之人哉.
朴主簿卽姪 子偉甫也.
問其名, 仁位氏朝隣云.
余敬其○感其誠書請簇面以記之,
冬旬二, 朴同知道卿爲仁位氏情, 以識不忘."
"나는 계사년 가을에 조정의 명을 받들어 대마도 빈관에 와 머무르고 있었다.
어떤 일본인이 초상이 그려진 족자를 보여주었는데 필법이 힘차고, 화폭에 생기가 가득했다. 이것은 누구의 상인가? 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일찍이 초량(부산)의 훈도의 집에서 의사 박주부를 만나
여러 날 동안 수업을 받아 사제의 정으로 나아가게 된 바가 많았는데,
그리워 잊을 수가 없었으나 다시 친해지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그 살아있는 모습을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술잔을 올렸다고 하였다.
내가 이를 듣고 탄복하며 말하기를 세상에 어찌 이같이 지성한 사람이 있을까 하였다.
박주부는 곧 조카인 위보이다.
그의 이름을 물으니 인위조린이라고 하였다.
내가 그의 ○에 삼가하고 정성에 감동하였는데, 족자에 글을 청해옴으로 이를 기록한다.
겨울 2월, 동지사 박도경이 인위씨의 정을 기록함으로써 잊지 않게 한다."
글의 내용은 파악하면 다음과 같다.
1713년 계사(癸巳)에 조정의 명으로 대마도에 건너간 박재창은 다음 해 1714년 2월 인위조린(仁位朝隣)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이 일본인이 초상화 한 폭을 보여주자 그는 그림에 담긴 사연을 물었다. 인위조린은 자신이 부산의 초량에 왔을 때, 종6품 주부(主簿)이며 성이 박씨이고 자호가 위보(偉甫)인 조선인에게 학업을 익혀 사제의 인연을 맺었으나 헤어지게 된 뒤에는 그를 잊지 못하여 초상화를 제작하고 아침 저녁으로 술잔을 올렸다고 하였다. 박주부의 숙부였던 박재창은 사연을 들은 후 세상에 어찌 이렇게 지성한 사람이 있을까 감탄하고 초상화에 글을 적었던 것이다. 아마도 인위조린은 대마도에 온 박재창이 박주부의 숙부라는 소식을 듣고 초상화의 제사를 받고자 방문한 것 같다. 이로써 초상화의 주인공은 부산의 의원 박주부가 된다. 인위조린이 박주부에게 무엇을 배웠는가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박주부가 의원이었으므로 의학 지식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족자형으로 현재 화면의 향 좌측 상단부를 비롯하여 하단부의 바탕지까지 박락이 진행 중이며, 박주부의 의복에선 붓을 대어 보태거나 호분과 금니로 필치를 보완한 흔적이 남아 있다.
[특징]
그림의 소장자인 인위조린은 대마도에 거주하는 인물이라는 점 외에는 확인이 어려우나 그림과 관련된 2명의 인물은 제사의 내용과 찬문 말미의 인장으로 어느 정도 추정가능하다. 찬문 말미에는 본적 등을 담은 도장(貫籍世家印)인 ‘무안후인(務安後人)’으로 미루어 제사자인 박재창과 그림 속 주인공인 박위보의 본관은 무안박씨(務安朴氏)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전형적인 중인 가문의 일원으로, 박재창은 물론 그의 증조부부터 자식 항렬까지 왜어 역관이 다수 배출되었으며 의관 등도 나왔다. 인위조린이 박주부를 만나 학업을 배운 초량은 바로 왜관임을 알 수 있으며, 일본 의원이 조선 의학계에 갖는 학문적인 동경심이 작품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확증할 수 없으나 당시 일본 내 화단의 주요 유파이며 어용화사로 활동한 카노파[狩野派] 화풍과 관련이 있다. 오른쪽으로 꽤 비스듬히 앉아 있는 인물의 자세가 특징적이며, 인물의 외곽선은 일반적인 인물화 묘법(描法)을 사용하여 굵기의 변화와 끊김이 자유롭다. 이러한 자세와 기법은 마치 카노츠네노부[狩野常信](1636∼1713)가 1711년에 그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태억 초상」을 연상시킨다.
[의의와 평가]
박주부에 대한 인위조린의 존경과 사모의 마음이 그림 속에 드러난다. 복식은 정복(正服)에 해당하는 관복 형태이나 당초문과 유사한 문양이 묘사되고 있어 마치 도교 선인이 입는 포를 연상시키며, 금으로 원형을 그린 옷의 문양이 양 어깨에 위치하고 있는 것도 있어 왕의 보(補)같기도 하다. 또한 신발은 성현이나 신선의 인물 모습에 자주 등장하는 방리(方履)와 비슷하다.
이렇게 실재하는 동시대 인물의 모습을 그릴 때, 성현과 신선의 의관(衣冠)으로 묘사하는 경우는 해당 인물을 존숭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방식으로, 조선에는 초상화법이 엄격한 탓에 18세기 후반부터 조금씩 나타나지만 일본에서는 꽤 일찍부터 등장한다. 한편 인물이 쓴 모자는 조선통신사 행렬도에도 보이듯이 의원이 평상복에 쓰는 것과 유사하여 주인공의 직책을 명확하게 알리고 있다. 그러나 ‘수복(壽福)’이 적혀진 경우는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워, 의관이라는 직업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으나 박주부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바람의 표현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1713년 이전에 그려진 박주부 초상은 18세기 초 의술을 매개로 조선인과 일본인이 맺은 사제 간의 정을 표현한 한일교류의 상징물이다. 특히 문위행과 관련있으며 환수문화재라는 측면에서 작품의 의의가 더욱 높다. 2020년 1월 29일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1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