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3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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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渚洞平江-晋州姜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DaeJeod-dong Gyeongsan Jeon Ancestral Village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 평강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상기 |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에 있는 진주 강씨 세거지.
[개설]
우리나라 강씨(姜氏)는 고구려 때 도원수를 지낸 강이식(姜以式)을 시조로 하지만 이후 통일 신라와 고려 중엽까지 문헌이 실전되어 그 계보를 밝힐 수 없다. 이에 따라 시조 강이식의 원손을 각각 중시조로 하여 박사공파, 소감공파, 시중공파, 은열공파, 인헌공파로 구분한다.
대저동 평강 마을 진주 강씨는 박사공파(博士公派)에 속한다. 박사공파는 고려 원종(元宗) 박사 강계용(姜啓庸)을 1세조(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다. 2세 강인문(姜引文)은 아버지 뒤를 이어 통신사 서장관으로 일본을 몇 차례 드나들었다. 3세 강사첨(姜師瞻)은 충렬왕(忠烈王) 때 감찰어사를 지냈으며, 4세 강창귀(姜昌貴)는 판도정란을 거처 계림 판관을 하였다.
5세 강군보(姜君寶)는 정당문학 첨의평리를 거처 예문관 대제학, 삼중대광 상의 문하찬성사를 지냈다. 6세 강시(姜蓍)는 판도판서와 밀직부사, 추중 보조 공신에 올랐고, 7세 강회백(姜淮伯)은 이조 판서, 예문관 대제학, 정당문학 겸 대사헌을 하였다. 8세 강석덕(姜碩德)은 대사성, 이조 참판, 개성부 유수, 대광보국숭록대부, 세자사를 지내면서 고려 시대 명문 집안을 자랑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9세 강희맹(姜希孟)은 대학자로서 집현전 지제교 겸 경연사가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성종(成宗), 명종(明宗) 양대 실록을 찬하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편찬에 참여하는 등 많은 활동과 공적을 남겼다. 10세 강귀손(姜龜孫)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경연 춘추관 상감사, 세자 사부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11세 강태수(姜台壽)는 신미 별시에 장원하여 통훈대부 순천 도호부사 겸 병마 관제사를 하였고, 12세 강복(姜復)은 군인으로 적순부위, 충좌위 부사용으로 근무 중 22세에 순직하니 모두가 뛰어난 인물을 잃었다고 애통하였다.
13세 강극성(姜克誠)은 통훈대부, 홍문관 응교 겸 경연 시강관, 춘추관 기주관으로 활동하였으며, 14세 강세경(姜世慶)은 통훈대부, 장례원 사의를 하였으며, 15세 강진양(姜晉暘)은 부사용을 하였다. 16세 강윤후(姜胤後)가 충의위 어모장군으로 미수 허목(許穆), 이청하(李淸河)와 더불어 강도지란(江都之亂)을 평정하였다. 이렇게 고구려 도원수를 시작으로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많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 집안이다.
[명칭 유래]
강서구 지역이 만들어질 때 낙동강 홍수 등으로 위쪽에서부터 실려 온 모래가 칠점산(七點山)에 부딪히면서 쌓여 낙동강 하구 삼각주를 형성하였다. 그 물줄기가 어느 때 3갈래로 갈라져 흐르고 있는데, 그 가운데로 흐르는 강을 평강천이라고 하였다. 평강천 가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해서 평강(平江) 마을이라고 한다.
[형성 및 변천]
17세 강석지(姜錫祉)는 어모장군 강윤후(姜胤後)의 아들로 무예와 문장이 뛰어났다. 호를 무이거사(武夷居士)라 하고 함안군 칠원(漆原)으로 이거하여 살면서 많은 글을 남겼다. 그의 여섯째 아들 18세손 강원부(姜源溥)가 1715년(숙종 41)경 강서구 대저동 진주 강씨 입향조다. 23세 강영도(姜永度)는 통정대부 호조 참의를 증직받았다. 그의 아들 24세 강서수(姜瑞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내면서 이조 참의를 증직받았다. 25세 강대주(姜大周)는 통정대부면서 청렴결백하고 문학과 도학이 높아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28세손 강종순[강종무]는 일본 동경대학교를 졸업하고, 내무부 건설국장, 국회의원 등을 역임했고, 아우 강종수는 도의원을 하고 그의 아들 강병철은 야구감독으로 이름 났다.
[자연 환경]
대저동 평강 마을은 낙동강 하구의 삼각주인 대저 평야에 위치하여 갈대밭을 개간한 농지가 매우 비옥하고 평탄하게 펼쳐진다. 마을 서쪽으로 평강천이 흐른다.
[현황]
김해 국제공항이 확장되면서 많은 지역이 철거된 데다 부산 지하철 3호선 기지창이 들어서고 점차 산업화되면서 대저동 평강 마을도 농촌 마을로서의 환경을 잃어가고 있다. 2013년 현재 대저동 평강 마을 진주 강씨는 불과 10여 가구밖에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