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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384
한자 李八龍
영어음역 Yi Palyong
분야 문화·교육/체육,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남태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야구 선수
성별
대표경력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출생 시기/일시 1918년 5월 10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35~1937년 - 일본 시모노세키상업학교 재학
수학 시기/일시 1938~1942년 - 메이지대학교 재학
활동 시기/일시 1942~1946년 - 도쿄 자이언츠 선수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3년 - 일본 프로 야구 5관왕 달성
활동 시기/일시 1943년 - 노히트 노런 달성
활동 시기/일시 1947년 - 주니치 입단
활동 시기/일시 1948~1955년 - 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9년 - 사와무라 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50년 - 일본 프로 야구 첫 퍼펙트게임 달성
몰년 시기/일시 1997년 4월 26일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이팔용 출생지 - 부산광역시 동구 고관로[초량동]

[정의]

부산 출신의 일본 프로 야구 선수.

[활동 사항]

이팔용(李八龍)은 1918년 5월 10일 부산 초량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부모와 함께 일본 야마구치 현 시모노세키로 건너갔다. 일본식 이름은 후지모토 히데오[藤本英雄]이다. 1935년 일본 시모노세키상업학교에 입학하였고, 1938년 메이지[明治]대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시절 대학 역사상 최다승인 개인 통산 34승을 기록하였다.

1942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프로 야구단인 도쿄 자이언츠[1947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개칭]에 입단하였다. 그해 9월 17일 첫 등판한 경기에 당시 도쿄 자이언츠 경기 사상 최다 관중인 1만 6942명이 몰렸다. 프로 야구에 입문한 첫해 9월부터 10승 무패, 방어율 0.81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팔용의 활약으로 도쿄 자이언츠는 2위에 12.5 경기 차이로 우승하였다.

1943년 일본 프로 야구 5관왕과 노히트 노런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였다. 이해 시즌 34승, 평균 자책점 0.73, 탈삼진 253개를 기록하며 다승왕, 최고 평균 자책점, 최다 탈삼진 등을 모두 석권해 투수 부문 3관왕을 달성하였다. 또한 여섯 경기 연속 완봉승을 비롯하여 19경기 완봉승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아직까지도 일본 프로 야구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해 도쿄 자이언츠는 54승으로 우승하였는데, 이 승수의 2/3를 이팔용이 달성하였다.

1944년에는 중일 전쟁으로 선수들이 징집되는 바람에 선수가 모자라자 25세의 나이에 감독까지 겸임하였다. 또 전쟁으로 경기 수가 대폭 줄어들었는데도 114 탈삼진으로 삼진왕을 차지하였다. 1947년 주니치를 거쳐 1948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복귀하였다. 1948년 어깨 부상으로 부진하였으나, 1949년 24승 9패의 성적으로 부활하였다. 방어율 1.94로 최우수 방어율 타이틀을 획득하였고, 요미우리 자이언츠 2위에 16경기 차로 우승하였다. 이해 이팔용의 투구 방법은 슬라이더였다. 이팔용은 어깨 통증으로 고생하면서 미국의 밥 펠라(Bob Feller)의 저서를 읽고 슬라이더 구질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1950년 6월 28일 아오모리에서 니시니폰[西日本]과 치른 경기에서 선발 예정 투수가 복통을 일으켜 대신 등판하였는데, 이 경기에서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퍼펙트게임을 달성하였다. 이해에는 타자로도 활약하여 7홈런을 기록, 일본 투수 사상 최다 홈런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에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에서 이팔용에게 상금 3만 엔을 수여하였다고 한다.

고질병인 어깨 통증으로 1954년 1승 2패로 시즌을 마감한 이팔용은 1955년 시즌 말인 10월 11일 히로시마 경기에서 5회 무실점으로 승리하여 통산 200승으로 현역을 은퇴하였다. 이로써 일본 프로 야구에서 13년 동안 통산 200승 87패 평균 자책점 1.90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남겼다. 현재 이 기록은 일본 야구 전문가들도 깨질 수 없다고 한다.

1955년 은퇴한 뒤 1956~1957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코치와 2군 감독을 맡기도 하였다. 이후 다이와 증권 팀의 감독으로 일하였고, 요미우리신문 로스앤젤레스지국 주재원도 맡았다. 이팔용은 1968년 대한야구협회의 초청으로 모국을 찾아 서울, 부산, 대구 등 전국 대도시 순회 야구 강습회를 열었다. 이팔용은 이 자리에서 자신의 귀화에 대해 회한의 편린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1976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자로 선정되었다. 1997년 4월 26일 심근 경색으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49년 사와무라 상[일본의 최고 선발 투수에게 주는 상으로, 미국 야구의 사이영 상과 비슷하다]을 수상하였다. 그 외 다양한 프로 투수상을 수상하였다. 일본 아오모리 시영 야구장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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