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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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荒浪平治郞 |
영어음역 | Aranami Heichiro |
이칭/별칭 | 황랑평치랑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전영섭 |
[정의]
일제 강점기 개성학교 창립자이자 초대 교장.
[활동 사항]
1. 가계와 학력
아라나미 헤이치로[荒浪平治郞]는 1858년 5월 1일 일본 시즈오카 현[靜岡縣] 지태 군 도전정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기에는 가업인 농사에 종사하였다. 8세 때 마을 경복사의 주지 밑에서 습자, 수학 등 초보적인 교육을 받고 후일 한학을 습득하다가 19세 때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처음 상업에 뜻을 두었다가 여의치 않아 25세 때 도쿄에 유학하였다. 얼마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도쿄로 전 가족을 데리고 이사한 뒤 외국어 공부에 전념하였다.
1887년 도쿄 철학관에 입학하여 1890년 전과를 마쳤을 때 32세였다. 그 후 한국에 건너와 일신의 영달을 버리고 한국 교육계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으나 천성이 호방하고 일본 낭인의 대륙적인 성격을 띠어 식민지 교육에 앞장선 부분이 없지 않았다.
2. 개성학교 설립
졸업한 이듬해 육군 예비상무학교 교사로 취임하였으나 2년간 재직한 후 청(淸)·한(韓) 만유(漫遊)를 기도하고 1895년 2월 내한하여 부산에 머무르던 중 부산 경무관 박기종(朴琪淙)을 만나 개성학교 설립을 상의하게 되었다. 아라나미 헤이치로는 실제 교육 방면을 담당하는 데 박기종과 합의하고 개교하기에 이르렀다.
아라나미 헤이치로의 수기에 당시 개성학교 설립 과정에 대한 기록이 있다. “본교 설립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부산의 유지 박기종씨가 미리부터 학교 설립의 뜻이 있다는 것은 들어왔으나 이를 착수하게 된 때는 1895년 5월이었다. 이에 앞서 본인은 뜻한 바가 있어 한(韓)·청(淸)·노(露) 만유의 뜻을 품고 가던 중 부산에 체제하는 사이에 하루는 영가대(永嘉臺)의 간친회에 초빙되어 그곳에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 후 다시 진(秦) 감리(監理), 이(李) 검사(僉使), 박(朴) 경무관(警務官) 들로부터 서신 연락이 있어 수차 내왕하면서 친밀해졌다. 당시 가등(加藤) 부산 영사가 중간에 들어 상호 협조하는 데 편익을 도모하였다. 박씨는 동분서주하여 유지 네 사람을 얻어 각기 300원씩 합계 1,500원을 출자하여 교사를 건축하기로 하고 본인에게 교무 및 교수상의 제반 업무를 위임하기로 되어 박씨와 합의하여 착수에 이르렀다.
그 때 외부 교섭 국장(外部交涉局長) 조중응(趙重應)씨가 내부하여 나도 이에 찬성의 뜻을 표하였다. 이에 본인은 중앙의 정황을 시찰하고자 일단 상경하여 당시의 내부대신 박영효(朴泳孝)씨를 방문하였으나 부재중인 탓에 만나지 못하였다. 당시 경성[현 서울]은 동학당의 처리 등 내외 다난하여 학교 설립 등에는 난관이 많았다.”
1907년 학교 운영이 어려워 부산개성일어학교로 개명하였고, 1909년 2월 사립 부산개성일어학교를 정부에 헌납하고 교육계를 떠나 경성에 일본홍도회 지부를 설치하여 군국주의자로서의 인상을 남겼으며 1921년 9월 25일 63세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