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5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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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盤松洞南原梁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Uam-dong Namwon Yang Clan Hometow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송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주영택 |
[정의]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송동에 있는 남원 양씨 세거지.
[개설]
남원 양씨(南原梁氏) 시조 양을나(良乙那)는 제주도에 탐라국을 세웠다고 전한다. 양씨는 모두 제주 양씨에서 분관했는데, 양을나의 후손 양탕(良宕)이 광순사로 신라로 들어오자 559년(진흥왕 20) 왕이 벼슬을 내리고 ‘양(良)’을 ‘양(梁)’으로 고치게 하였다. 이후 757년(경덕왕 16) 양우량(梁友諒)이 신라 왕실에 공을 세워 남원부백(南原府伯)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남원으로 분적하면서 제주와 남원으로 분관되었고, 후에 충주로도 분관되어 3적으로 나뉘게 되었다. 양씨의 분적종 및 분파는 병부공파(丙部公派)[양능량], 예성군파[양능길], 청주파[양성준], 대방군파(帶方君派)[양수정], 용성군파(龍城君派)[양주운], 장영공파(章榮公派)[양윤위]로 구분된다.
[명칭 유래]
반송의 명칭은 운봉초등학교 앞에 수령이 200여 년 넘는 아름드리 소나무를 반송 나무굴이라 칭하면서 비롯되었다. 반송동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이라 하여 본동(本洞), 본리(本里) 마을이라고도 하고 웃반송이라고도 한다. 반송동은 옛날 기장현과 동래부의 경계를 이룬다 하여 지경리(地境里)로도 불렸다.
[형성 및 변천]
남원 양씨 평창공파(平昌公派) 양겸(梁謙)[10세]이 1500년 중반 경상북도 의성에서 동래 가매실[부곡]로 이거하였다. 양겸의 세 아들 가운데 큰아들 양조한(梁潮漢)은 노포동으로 이거하여 아들 양홍(梁鴻)을 두었다. 둘째 아들 양근한(梁根漢)은 양정동으로 이거하였다. 셋째 아들 양통한(梁通漢)은 두 아들 양의(梁鸃)와 양숙(梁鷫)을 두었다. 양의의 아들 양취일(梁就一)이 1600년경 반송으로 입향하였다. 19세기 중반 삼절사(三節祠)[임진왜란 때 순절한 양지, 양조한, 양통한을 모신 사당]와 반송재를 건립하여 조상 숭배와 종족 화목의 집성촌을 이루었다.
[자연 환경]
반송동 북쪽 개좌산[449m]과 운봉산[454m]에서 이어지는 산줄기가 해운대구 우동의 장산으로 이어져 반송동 동쪽을 에워싸고 있다. 이들 산지 사이에 있는 기장군 안평 마을 일대에서 발원한 석대천이 서쪽으로 흘러 반여동을 거쳐 수영강에 합류한다. 하천이 반송동을 지나면서 유역에 침식 분지를 이루고, 이곳에 주거지가 발달하고 있다.
[현황]
1940년대 반송동에는 남원 양씨 40여 가구가 살며 집성촌을 이루었으나 2013년 현재는 반송 마을 20여 가구, 신리 마을 5가구가 살고 있다. 남원 양씨 재실 반송재[해운대구 반송동 141번지]는 삼절사 상절문을 들어가면 왼쪽에 자리 잡았다. 1896년 건립하고 1990년 개건하였으며, 남원 양씨 평창공파 반송 문중 선조 51위[103분]을 안봉한다. 향사일은 음력 10월 첫째 주 일요일이며, 후손 80여 명이 참석한다. 남원 양씨 평창공파 반송 문중 회장은 양남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