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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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渚洞登龜-驪興閔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Daejeo-dong Yeoheung Mins’ Clan Village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 등구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민경준 |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에 있는 여흥 민씨 세거지.
[개설]
부산의 구포 대교를 건너 공항로를 타고 김해 공항 방향으로 3㎞쯤 가면 나오는 강서구 대저동 등구 마을에는, 대저동에서는 유일하다고 알려진 여흥 민씨(驪興閔氏) 세거지가 있다. 등구 마을의 민씨는 여흥 민씨 12세손 유수공(留守公) 민심언(閔審言)을 중시조로 하는 일파이다. 마을 형성 초기에는 민씨를 비롯하여 오씨, 정씨 등이 이주하여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여러 성씨가 섞여 거주하고 있다.
[명칭 유래]
강서구 대저 1동과 대저 2동의 경계 지점에 자리한 등구 마을은 옛날 바다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거북이 올라왔다고 하는 ‘등구막(登龜幕)’, 또는 옛날 등구나무 숲이 둘러싸고 있어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전한다.
[형성 및 변천]
경기도 통진읍(通津邑), 즉 현 김포를 세거지로 하던 여흥 민씨 유수공파의 일파가 현재의 부산광역시 북구와 경상남도 양산시, 김해시 일대로 이주해 온 시기는 17세기 전반 병자호란 때이다. 20세 민홍위(閔弘位)가 전란을 피해 가솔을 이끌고 남쪽으로 피난을 내려와 언양을 거쳐 양산으로 건너왔다고 하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초기 정착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민홍위의 묘를 안치한 곳이 ‘양산 좌면(左面) 만덕산(萬德山) 가야곡(伽倻谷)’, 즉 현 부산광역시 북구 만덕동의 만덕산 가야골이다.
이후 여흥 민씨 거주지는 구포, 금곡, 양산 동면, 김해 대동면 등 낙동강과 양산천의 합류 지점부터 구포와 대저 일대까지 낙동강을 따라 형성된 고을에 분포하였다. 약 200년 전에 형성된 대저동 등구 마을 입향조는 시기로 보아 19세기 초로 26세 또는 27세에 속한 인물로 추정된다. 이들 민씨는 학문과 출사보다는 대대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자연 환경]
대저동 등구 마을은 낙동강 삼각주의 일부인 대저도 동쪽에 자리한다. 동쪽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넓은 평지가 나타나며, 그 가운데 칠점산이 자리하고 있다.
[현황]
대저는 원래 낙동강 하구에 형성된 평지의 큰 섬이다. 비옥한 충적토를 가졌지만 잦은 홍수로 농지 개발은 비교적 늦어서 조선 시대가 되어서야 전답과 제방 축조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쌀과 채소, 소금, 김, 생선 등의 농업 및 어업과 갈대를 이용한 수공업품을 생산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16년부터 1926년까지 대대적인 낙동강 치수 사업과 1931년 김해군 대동면 월촌리부터 명지동 진목 마을까지의 낙동강 개수 공사, 1934년 녹산·대저 수문과 낙동 장교[구포 다리] 완공으로 대저 일대는 ‘강서 평야’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배를 비롯한 과수도 유명하지만 대저 지역의 주 농업은 줄곧 벼농사였고, 현재는 쌀과 함께 토마토를 특산물로 내세우고 있다.
대저동 등구 마을에 형성된 여흥 민씨 세거지는 그 역사도 길지 않고 세대수와 규모도 크지 않지만 조선 후기부터의 대저 농업 개발의 생생한 현장을 함께 하며 집단 거주지를 형성해 왔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여흥 민씨 7가구가 있었지만 공항로 확장과 생업의 다변화에 따른 이주로 인해 2013년 현재 3가구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