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3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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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渚洞上芳-金海許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Residential Place of Gimhae Heo Clan in Daejeo-dong Sangbang Village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 상방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상기 |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에 있는 김해 허씨 세거지.
[개설]
김해 허씨(金海許氏)는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이 시조(始祖)이다. 허 왕후의 두 아들로 하여금 허씨(許氏)의 성을 계승하게 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세계(世系)가 이어지지 않아 고려 시대 중엽 후손들이 각기 사는 곳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김해(金海), 하양(河陽), 태인(泰仁), 한산(寒疝), 양천(陽川)의 다섯 파(派)를 이루었다. 그중 한산 허씨(漢山許氏)는 손이 끊어지고 현재 김해, 하양, 태인, 양천의 4개 파가 대를 이어 오고 있다.
[명칭 유래]
대저동 상방(上芳) 마을의 옛 이름은 상등으로, 제일 높은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들판에 클로버 꽃이 만발하여 상방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형성 및 변천]
김해 허씨의 중시조는 김수로왕의 35세로 전해지는 허염(許琰)으로, 고려 중기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르고 가락군(駕洛君)에 봉하여졌다. 2세 허군언(許君彦)은 병부 시랑이 되었으며, 3세 허자(許資)는 병부 상서에 올랐고, 5세 허평(許枰)은 판도판각(版圖判閣)[현재의 재무부 장관]에 올라 고려에서 명문 집안으로 활약하였다. 6세 허증(許增)은 조선 전기 참판이 되었으며, 7세 허언룡(許彦龍)은 예조 판서를 지내면서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는데, 판서공파(判書公派)의 파조이기도 하다. 9세 허수(許修)는 직장(直長)이 되고, 10세 허종의(許宗義)는 참봉이 되었으며, 11세 허숙통(許淑通)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이 되어 이후 판서공파 중에서 어모장군파(禦侮將軍派)로 부르고 있다.
12세 허인수(許仁壽)는 장사랑(將仕郞)으로 직보훈도(直寶訓導)가 되어 조선 시대에도 김해 허씨 집안을 명문으로 이끌어 왔다. 김해 허씨 중시조의 15세손 허경표(許景標)는 학문이 높은 사람으로 임진왜란을 비롯한 여러 전란을 피하여 가족을 이끌고 산으로 들어가 무사히 가족을 구하였다. 허경표의 손자 17세 허시영(許時暎)은 학문을 좋아하고 독행하여 세상으로부터 무게 있는 예우를 받았으며, 20세 허각(許珏)은 효행이 지극하여 영조(英祖)로부터 통정대부(通政大夫)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증직받았으며, 『세례강안언호(世禮岡安彦浩)』를 저술하였다. 허각의 둘째 아들 21세 허경(許暻)도 문장이 뛰어나 세상에 저술(著述)로 알려졌다. 그 후 29세 허차영(許且寧)이 1936년경 장유(長有)[현 경상남도 김해시 풍유동]로부터 대저(大渚)로 이주하였다.
[자연 환경]
강서구 대저동 상방 마을은 낙동강 삼각주의 하중도인 대저도에 자리한 마을로 동쪽으로 낙동강이 흐르며, 주변은 넓은 평지가 나타난다.
[현황]
2006년까지 김해 허씨는 상방 마을 5가구를 중심으로 강서구 대저 2동 각 마을에 흩어져 25가구 가까이 살았으나 각기 파가 달랐다. 2013년 현재는 그 절반 정도만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