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3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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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右洞東萊鄭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Residing for Generations of Udong Dongrae Jeo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동 못안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손숙경 |
[정의]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동에 있는 동래 정씨 세거지.
[개설]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19세기 전반 재송 뒷골에서 우동 못안[지내리]으로 이주하여 세거한 가문이다. 동래부 동하면 우동 못골은 현 해운대도서관 자리이다. 동하면에 거주한 동래 정씨는 19세기 후반 이후 동래 향교와 서원 등에 출입하면서 동래 사족들과 교유하였다. 또한 경제적으로 매우 넉넉한 편에 속하였다. 해운대구 우동의 동래 정씨는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부류보다 가구 수는 적으나 동하면의 주요한 향반으로 인정받았다.
[명칭 유래]
우동은 조선 시대 사료에서도 나타난다. 당시 지명은 지금과 달리 우(右) 자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좌동의 대칭 지명으로, 춘천천의 우안(右岸)에 위치한 데서 비롯되었다. 우동 못안[池內] 마을은 장지에 있는 저수지[지금의 해운대도서관 자리]를 경계로 안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또한 우동에 연못이 있어 지내 마을, 지곡(池谷) 또는 못안이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동래 정씨가 동래부 동하면의 우동 못안에 세거한 것은 19세기 전반이다. 동래 정씨는 원래 재송 뒷골에 거주하였다가 임진왜란 이후 용호동, 중동 등으로 이주하였다. 동하면의 첫 거주지는 중동이며, 그 후 철종 조에 우동으로 이주하였다. 이는 1861년(철종 12) 정부명(鄭富命)의 준호구에, 중동으로부터 이주하여 우동에 새로 호를 만들었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우동의 동래 정씨는 정부명의 셋째 아들 정재화(鄭在和)로부터 시작된다. 정부명의 첫째 아들인 정재선(鄭在敾)이 중동에 계속 거주하면서 동하면의 동래 정씨는 중동과 우동 두 곳으로 나뉘게 된다. 우동에 거주한 정재화는 아버지 정부명의 뒤를 이어 향교에 출입하였다. 정재화의 아들인 정구조(鄭龜朝), 정봉조(鄭鳳朝)도 향교를 중심으로 한 지역 사회 권력의 문화적 연망에 계속 참여하여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여 나갔다. 또한 우동 연못 근처의 대부분의 땅을 소유하였다는 구전과 일제 강점기 금융 조합 관련 문서와 부동산 관련 문서를 통해 이 집안의 경제적 기반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자연 환경]
우동 못안 마을 북쪽은 장산에서 이어진 선황봉이 자리하며, 서쪽으로 장산에서 이어진 봉대산[간비오산으로도 불리며 봉수대가 있었음]이 자리하고 있다. 못안 마을 북서쪽 골짜기에는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추워도 얼지 않는 돌샘이 있어 마을 우물로 이용되었다. 마을에 못안 저수지가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현황]
2013년 현재 해운대구 우동은 도시화가 진행되며 성씨 세거지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