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3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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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田洞江陵金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Bujeon-Dong Gangneong Gim Family Line Villagy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전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류종현 |
[정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전동에 있었던 강릉 김씨 세거지.
[개설]
강릉 김씨(江陵金氏) 시조는 신라 혜공왕(惠恭王) 때 시중(侍中)을 지낸 김주원(金周元)이다. 선덕 여왕이 죽자 김주원이 왕으로 추대되었는데, 홍수 때문에 입궐하지 못하여 상대등(上大等) 김경신(金敬信)이 원성왕이 되었다. 이후 김주원은 강원도 명주[현재의 강원도 강릉]로 물러났고, 2년 후 조정에서 명주군왕(溟洲郡王)으로 삼아 명주와 울진을 식읍(食邑)으로 내렸다. 이후 후손들이 본관을 강릉으로 삼았다. 강릉 김씨는 신라 시대 진골 귀족으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명칭 유래]
부전동은 본래 부현리라 불렀다. 부현리는 현 부산진구 당감동 입구 부암 고개에 있던 바위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추정한다. 이곳에 있던 바위가 마치 가마솥을 거꾸로 엎어 놓은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가마 고개라 하였고, 이를 한자화한 지명이 부현이라는 것이다. 부전의 ‘전(田)’ 자는 비교적 논밭이 많은 평지에 붙여진 명칭으로, 부현 고개 아래가 평지[인근에 전포동(田浦洞)과 범전동(凡田洞)이 있음]라서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형성 및 변천]
강릉 김씨 족보에 따르면 김주원의 22세 김윤신(金潤身)[호 괴당(槐堂)]이 괴당공 옥가파(玉街派) 파조이다. 이후 돈령 참봉 김세달(金世達)→ 예빈시 직장 김광언(金光彦)→ 증공조 참의 김임(金銋)→ 첨지중추 김몽상(金夢祥)-김귀남(金貴南)으로 이어 졌다. 김귀남은 4남 1녀를 두었는데, 셋째 아들 김정진(金貞震)이 결혼하고 김지봉(金之奉)을 낳았을 무렵 마침 병자호란이 발발하였다. 난을 피하려고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조선 효종 때 울산 온양에 정착하였다.
김지봉의 아들 김일소(金日蘇)는 동지중추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김원실(金元實)이 밀양으로 옮겨 갔다. 김원실의 아들 김수익(金壽翼), 김수익의 아들 김학재(金學載)에 이르러 울산으로 돌아갔다. 이후 김학재→ 김병인(金秉仁)→ 김연복(金演福)·김연영(金演榮)으로 이어졌다. 김연복의 둘째 아들 김주경(金注卿)이 생업을 위해 기장으로 이거하면서 동래 입향조가 되었는데, 그때가 철종 초인 1850년대이다.
김주경이 동래로 내려온 이후로는 족보에서 누락되어 그 후대를 알 수 없으나, 기장에서 얼마 살지 못하고 아들 대에 해안 통을 따라 이거하여 부전동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부전동에 정착한 첫 입향조는 분명하지 않으나 1904년 발간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에 총 12가구 중 김씨가 8가구로, 여기에 기록된 호주 김내종(金來宗), 김차종(金且宗) 두 형제의 아버지가 연대로 보아 부전동에 처음 정착한 입향조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까지 살고 있는 후손을 찾을 수 없어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자연 환경]
부전동이 속한 지역은 대부분 평지이다. 성지곡 일대에서 발원한 부전천이 남쪽으로 흘러 동천으로 유입하며, 과거 광무교가 있었다. 현재는 부전동을 지나는 유로는 대부분 복개되어 복개로라는 명칭으로만 그 흔적을 알게 한다.
[현황]
1934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의 성(姓)』에는 부전동에 강릉 김씨 30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2013년 현재는 강릉 김씨 가구를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