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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를 배경으로 한 현대 문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099
한자 梵魚寺-背景-現代文學
영어의미역 Contemporary Literature with Beomeosa Temple as the Background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36]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조명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범어사 -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지도보기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에 있는 범어사를 배경으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이루어진 문학 활동.

[개설]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36번지금정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범어사는 화엄 십찰(華嚴十刹) 가운데 하나로 신라 문무왕 대[혹은 흥덕왕 대로도 추정함]에 창건된 절이다. 배흘림기둥을 한 돌기둥 넷을 한 줄로 세워 지붕을 얹은 일주문과, 천연기념물 176호로 지정된 부산 범어사 등나무 군락이 유명하다. 범어사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이 자주 드나들면서 불교의 친일화를 도모하기 위한 조선총독부의 「사찰령」에 반대하는 승려 궐기 대회를 열고 조선 임제종 종무원을 두면서 1913년 『불교대전』을 발행하기도 했다. 이곳에서 출가한 김법린(金法麟)[1899~1964]은 1908년에 범어사가 세운 사립 명정학교(明正學校) 교사로 있으면서 3·1 운동을 이끌었으며, 1938년 만당 사건과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범어사 배경 시]

범어사는 지역 사회의 종교 중심지로 빼어난 자연 환경을 지녔지만, 이곳을 배경으로 한 현대 문학은 그다지 많지 않다. 범어사의 풍광을 그린 작품으로는 1908년 울산에서 출생한 시조 시인 근포(槿圃) 조순규(趙淳奎)[1908~1997]의 시조 「봉래유가 범어사(蓬萊遊歌梵魚寺)」와 1909년 강원도 영월에서 출생한 시조 시인 영담(影潭) 김어수(金魚水)[1909~1985]의 시조 「범어사 삼기팔경(梵魚寺三奇八景)」을 들 수 있다. 두 시조는 특히 독특한 세 가지 암석과 자연이 일구어낸 풍경 여덟 가지를 일컫는 범어사 삼기팔경(三奇八景)을 소재로 삼았다.

1. 조순규의 「봉래유가 범어사」 중에서

“노송(老松)은 울울창창(鬱鬱蒼蒼) 한울가리고/ 물소리 쾅쾅졸졸 장단마추네/ 범성(梵聲)은 목어성(木魚聲)에 석기여나고/ 아츰밤 종(鍾)소리는 산(山)을 울니네/ 가을와서 단풍(丹楓)이 산을 수노면/ 극락(極樂)이 이곳인가 의심(疑心)이 드네.”

(『조선 일보』, 1928. 2. 7)

2. 김어수의 「범어사 삼기팔경」 중에서

“돌우에 샘이됨도 희유(稀有)하다 이르거늘/ 범어(梵魚)가 놀았다니 그 더욱 묘(妙)할시구/ 그 중(中)에 금(金)빛 있으니 금정(金井)이라 하드라.”

『불교』 신제 25집(불교사, 1940. 7)

조순규 시조는 범어사 팔경 중 ‘어산노송(魚山老松)[어산교의 노송]’의 자태에 감격스러워 하고 있으며, 김어수의 시조는 범어사 삼기 중 ‘엄상금정(巖上金井)[금샘]’에 대한 외경심을 드러내고 있다.

[범어사 배경 소설]

시조가 범어사를 품고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있다면, 소설은 그 태생에 걸맞게 사회 역사 배경 안에서 범어사를 읽어 내고 있다. 범어사는 요산(樂山) 김정한(金廷漢)[1908~1996]의 소설 「사밧재」에서 먼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소설은 경상남도 양산의 시파령(沙婆嶺)[사밧재]의 어원이 범어사와 관련 있음을 말할 뿐이다.

범어사의 사회 역사적 성격을 그려낸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김정한의 또 다른 소설 「사하촌(寺下村)」[1936]을 단연 손꼽을 수 있다. 이 소설은 일제 강점기 사찰의 착취와 이로 인한 농민들의 고통과 극복 의지를 그렸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사찰 명칭은 ‘보광사’이다. 그러나 요산이 범어사 인근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을 뿐 아니라 종조부 중 한 분이 범어사의 승려였던 등 범어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는 점에서 범어사「사하촌」의 배경으로 자리하였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옥심이」에서는 ‘백암사’로, 「추산당과 곁 사람들」에서는 ‘백련암’으로, 「묵은 자장가」에서는 ‘청운사’로 변주되곤 했던 요산 작품의 특성과 맥을 같이 한다. 즉 사찰명과는 상관없이, 김정한의 소설이 그린 사찰의 모습 속에는 그가 느낀 범어사가 녹아들어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기에 김정한은 “작품 속에 나오는 몇몇 장면이 내 고향에 있는 절 또는 거기서 일어났던 일과 비슷한 데가 있었기 때문”에 범어사 주지의 의붓자식의 사주로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김정한이 그려낸 범어사는 현대시에 와서 또 다른 모습으로 재현된다. 현대시는 범어사의 현재성을 “무슨 큰 잘못”을 기억하며 벌을 받고 있는 정신에서 찾기도 한다. 손택수의 「범어사 독성선 아래서」란 시에서 “절이 무너지지 않는 건 순전히”, “두 동자승의 무슨 큰 잘못 때문”이기에, 범어사는 잘못의 부정성과 긍정적 힘을 공유한 역설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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