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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098
한자 溫泉場-背景-現代文學
영어의미역 Contemporary Literature with Oncheonjang as the Background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조명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장소 온천장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일대

[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있는 온천장을 배경으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이루어진 문학 활동.

[개설]

조선 시대에 들어 온천을 이용한 건강 요법과 온천이 지닌 치병 효능이 알려지면서 온천 활용이 일반화되기 시작했고, 온천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온천 이용의 제도화도 시행되었다. 삼국 시대부터 온정(溫井)으로 유명했던 금산 마을[동래 온천]은 이수광(李睟光)[1563~1628]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도 좋은 온천으로 손꼽혔다. 이곳이 본격적인 근대 관광지 온천장으로 개발된 것은 일제 강점기 전차가 들어서면서였다. 동래 온천과 금강원은 일제에 의해 조성된 식민지 관광의 환락 공간으로 변모했다. 동래 별장금강 공원을 옆에 끼고 있는 온천장은 해방 후 영욕의 세월을 거친 다음에야 시민들이 노천 족욕을 즐기는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온천장 배경 시]

온천장을 노래하거나 배경으로 삼은 문학 작품 수는 적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시문학 쪽의 작품 수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편인데, 이경수의 민요시 「동래온천(東萊溫川)」[1924], 조순규(趙淳奎)[1908~1997]의 「봉래유가(蓬萊遊歌)」[1927], 노자영의 「못잇는 그의게」(1926), 「반달 두 눈!-금정산(金井山) 녯자리를 생각하고」[1926], 「봄의 찬미(讚美)」 등에서 일제 강점기 온천장을 확인할 수 있다.

1. 이경수의 「동래온천」 중

“삼남(三南)의 베파튼/ 죽이 돈은/ 온천장(溫泉場) 독탕(獨湯)에/ 다 녹아난다/ 아서라 기생(妓生)아/ 곤댓질 말어라/ 네 얼굴 그립어/ 예 온 줄 아늬.”

2. 조순규의 「봉래유가」 중

“무궁화 삼천리(三千里) 좁지 않흔 벌에/ 동래(東來)야 온천(溫泉)만치 고은 곳 잇스랴.”

이경수의 시는 왜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한량과 토호, 기녀들의 흥청거리는 온천장의 풍속을 안타까움과 조소의 시선으로 묘사하는 데 반하여, 조순규의 시는 풍속은 배제한 채 공간의 예찬에 집중하고 있다. 위 두 시가 온천장의 지배적인 공간성·장소성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면, 노자영의 시 세 편은 온천장을 연정과 성애의 장소로 노래함으로써 새로운 장소성의 배태를 예언하고 있다.

[온천장 배경 소설]

소설에서 동래 온천이란 지명이 처음 나오는 작품은 최서해(崔曙海)[1901~1932]의 「누이동생을 따라」[1930]이지만 본격적으로 이곳을 그린 작가는 부산을 대표하는 두 소설가 김정한(金廷漢)[1908~1996]과 이주홍(李周洪)[1906~1987]이다. 김정한의 「그러한 남편」[1939]은 동래읍에 대한 묘사는 별로 없지만 토박이의 눈으로 동래를 바라보는 최초의 소설이다.

이주홍의 「지저깨비들」[1966]은 정미소를 일터 삼아 삶을 영위했던 지게꾼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 보이는데, 동래 일대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주홍의 「동래금강원」[1969]은 온천장의 한 풍속 토끼탕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토끼는 1960년대 초까지 사용되었던 은어로 온천장에서 매매춘에 종사하는 아가씨를 일컫는 말이다. 김정한「굴살이」[1969]는 금강 공원에 동물원이 들어서면서 그 골짜기의 굴에서 살다 쫓겨나는 젊은 어머니를 그렸으며, 이주홍의 「선도원일지」[1975]는 금강 공원 입구에 펼쳐진 각종 장사 업종에 대해 정확히 묘사함으로써 당대 온천장 인근 풍속의 일면을 보여 준다.

이 외에도, 지금의 동래경찰서 맞은편에 해당하는 옛 온천장 전차 종점의 풍경을 배경으로 한 손창섭의 「비오는 날」[1953], 세병교 넘어 동래역 가기 전 연밭에서 연뿌리를 캐는 광경을 담고 있는 윤후명의 「모든 별들은 음악 소리를 낸다」[1982] 등을 꼽을 수 있다.

온천장과 그 인근 지역은 부산에 오랫동안 정주한 소설가들에게 있어서는 사회적 풍경을 섬세하게 읽어내야 하는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장소였지만, 이곳과 오랜 인연을 지니지 못한 소설가들에게 있어서는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이해로 말미암아 비맥락화된 채 소설적 분위기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소용되는 공간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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