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0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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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影島-背景-現代文學 |
영어의미역 | The Modern Litratures Set in Yungdo Bridg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영도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문재원 |
[정의]
부산광역시 영도구에 있는 영도 다리를 배경으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이루어진 문학 활동.
[개설]
영도 다리는 1934년 11월 23일 개통한, 부산과 영도를 잇는 다리였다. 원래 영도는 1900년 이전까지 목장이었으나 그 기능이 사라지면서 조선인들이 이주해 살았다. 하지만, 부산항과 인접해 있어 일본인들의 토지 매입이 늘었고 조선소, 도자기 공장 등이 등장하면서 인구도 증가하였다. 영도와 부산 사이를 오가는 도선이 있었으나 늘어나는 왕래자를 모두 수용할 수 없었으며, 영도에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던 일본인 자산가들의 입김도 작용하여 1932년 다리 건설이 추진되었다.
[영도 다리 배경 시]
영도 다리는 상판의 일부를 열리게 하는 방식이어서 당시 부산 사람들에게는 명물이었다. 개통식 날 5만 명의 인파가 모일 정도로 부산 근대화의 상징물로 여겨졌다. 들었다 내렸다 하는 신기한 볼거리는 당시 문학 작품에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임화(林和)[1908~1953]의 시 「상륙」[1938]을 보면, “벌렸다 다물고 다물었다 벌리는/ 강철 도개교 입발 새에/ 낡은 포구의 이야기와 꿈은/ 이미 깨어진 지 오래”라며 다리의 영도 다리를 형상화하고 있다.
하지만 영도 다리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소로 떠오른 것은 6·25 전쟁을 전후해서였다. 수많은 피란민들은 임시 수도인 부산에 몰려들면서 망향의 설움을 대변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러한 정한은 6·25 전쟁 이후 유행한 여러 편의 유행가에도 등장하는데, 현인(玄仁)[1919~2002, 본명 현동주]의 「굳세어라 금순아」도 그중 하나이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지만/ 금순아 보고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 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는 노랫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시절의 피란민들의 애환과 시련을 담아내고 있다.
살기 위하여 남쪽 피난지로 몰려왔던 사람들에게 영도 다리는 이중적 장소가 되었다. “헤어지면 부산 영도 다리에서 만나자.”라는 말이 돌 정도로 영도 다리는 새로운 만남과 희망의 장소가 되기도 했고, 한편 고달픈 삶에 지쳐 희망 줄을 놓아 버린 사람들과 전쟁 통에 가족을 다 잃은 사람들이 차가운 바다 속으로 몸을 던졌던 눈물의 난간이 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시인 최원준은 「영도 다리는 다리가 아니다」에서 “영도 다리는 다리가 아니라, 부산”이며 특히 “6·25를 거친 부산 시민”의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산증인이 된다고 노래하고 있다. 현대 문학 작품 안에서 영도 다리는 이러한 ‘만남과 이별’의 이중적 장소의 이미지를 차용하면서 ‘근대의 명물’보다 줄곧 6·25 전쟁, 피란민, 가난, 산업화 등과 연결되면서 민중들의 애환을 그려 내는 장소로 등장했다.
피난 생활을 그린 시인 김광균(金光均)[1914~1993]의 시 「영도 다리」에서의 다리는 만남에 초점을 두고 있다. “영도 다리 난간 이슬에 젖도록/ 혼자 서서 중얼거리니/ 먼 훗날 누가 날 이곳에서 만났다 할까.” 화자는 술 한 잔을 할 친구 없는 현재의 처지를 한탄하면서도 이곳에서 ‘만남’에 대한 기대감을 놓지 않는다.
[영도 다리 배경 소설]
전쟁으로 인해 기구한 운명에 처한 이북 출신의 두 부부 이야기를 그린 윤진상의 소설 「영도 다리」[1997]에서도 “남한으로 갈라문 맨 끝탱이에 부산이란 데가 있다더라만, 살라문 거기로 가여 한다는 기야. 기라구, 거기에 가문 말야, 무신 다리가 잇는데, 기란데 그 다리가 하루에 두 번씩 벌커덕, 든다는 기야”라고 묘사하고 있다. 또한 김은국의 「순교자」에서는 1950년 겨울 평양에서 공산군에게 학살당한 12명의 목사와 살아남은 2명의 목사를 통하여 인간의 실존 문제를 다루면서 소설의 마지막을 영도 피란민 판자촌이나 천막 교회로 설정하고 있다.
한편 이주홍(李周洪)[1906~1987]의 「늙은 체조 교사」[1953]는 잘나가던 체육교사 나인무가 6·25 전쟁 통에 모든 것을 잃고 미군 깡통 물건 장사치로 전락한 이야기를 그려 내고 있다. 여기에서 영도 다리는 ‘죽음’과 인접한 장소로 묘사되어 있다. “영도 다리에 사람이 우우 몰려있기로 가 보니 사람 하나가 바닷물에 빠져 있었다.”라는 장면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영도 다리가 당시 전쟁 이후 망향의 애환과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유혹하는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또한 조해일의 소설 「내 친구 해적」에서는 영도 다리 위에서 ‘다이빙’ 하는 인물이 묘사되기도 한다. ‘바다의 생태를 닮은’ 내 친구는 “다리 위에서 3차 회전을 하며 바닷물로 뛰어드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술회한다. 친구는 수영과 잠수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해산물이 풍부한 바다에서 해조류와 패류를 따서 팔아 생계에 보탠다는 점에서 해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내 친구 해적」 역시 피난민들의 애환을 담고 있지만 그 안에서 공동체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으며, 이 메시지의 현장으로 영도 다리를 선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난, 고통, 망향으로 가득 채워진 작품들과는 다른 경향을 보인다.
또한 산업화 과정에서 영도 다리 인근의 ‘벌집 같은 판잣집’ 하층민들의 고단한 삶을 핍진하게 그려 낸 작품들도 있다. 윤진상의 「누항도」[1974]나 「나루터의 연가」[1982], 조갑상의 「은경동 86번지」[1984], 천운영의 「눈보라콘」[200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