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4210
한자 釜山例月會
영어공식명칭 Busan Monthly Meeting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승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회단체
설립자 안희제 등
설립 시기/일시 1919년 10월연표보기 - 설립
최초 설립지 부산예월회 - 부산시 중구 초량동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 유지들이 조선인의 생활과 교육, 경제적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결성한 사회단체.

[개설]

부산 지역 조선인 자본가들은 3·1 운동 이후 고양된 민족의식을 배경으로 자신들의 사회 경제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결성된 것이 부산예월회(釜山例月會)이다. 부산예월회는 1919년 11월 결성된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와 함께 1920년대 초 부산 지역을 대표하는 민족 부르주아지(bourgeoisie)의 단체였다.

[설립 목적]

부산예월회는 부산 지역 민족 자본가들이 그들뿐만 아니라 부산 지역민들의 교육과 사회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조직되었던 단체이다.

[변천]

1919년 10월 부산예월회를 결성한 이후 1921년 연말까지 활동한 것으로 파악된다. 1921년 당시 회장은 백산무역주식회사의 대표였던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1885~1943]이었다. 1921년 4월 북선창고주식회사 부산 지배인이었던 홍종희(洪鍾熙)가 간사를 사임하자 김종범(金鍾範)[1891~1972]이 이를 담당하였으며, 6월 20일 임시 총회에서는 평의원으로 김병규(金秉圭), 문영빈(文永斌), 김철수(金喆壽) 등이 피선되고, 김종범은 간사로 재선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부산예월회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모임은 매월 개최되었으며, 사안에 따라서 임시 총회가 개최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회원은 40여 명 정도로 임원은 회장, 간사, 평의원으로 구성되었다. 임원들은 임기에 따라 개선(改選)되었다.

주요 업무는 다음과 같다. 일본은 1920년 11월과 12월에 「임시교육조사위원회 규정」과 「조선총독부 교과서조사위원회 규정」을 각각 발표하고, 1921년 1월 임시교육조사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식민지 교육을 강화하려는 조선총독부의 이런 움직임에 맞서 민족 자본가들이 대응하였는데, 부산 지역에서는 부산예월회가 앞장섰다. 부산예월회는 1921년 3월 12일 임시교육조사위원회에 제출하기 위한 건의안을 연구, 심의하였다. 같은 해 4월 24, 25일에 걸쳐 부산의 유지 백여 명이 조선교육개선기성회를 조직하고 임시교육조사위원회에 제출할 진성서를 1천 수백 명의 연서로 작성하였다. 이때 부산예월회 회원들 역시 동래군 유지 40여 명과 함께 건의서를 작성하였다.

한편 일본은 1920년 4월 「회사령」을 철폐한 뒤 1921년 6월 「산업조사위원회 규정」을 발표하였다. 이에 민족 자본가들은 산업 개선 청원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부산예월회는 1921년 6월 25일과 6월 29일 임시 총회를 열게 된다. 당시 부산예월회의 핵심 멤버로 활동했던 김종범은 식민지 산업 정책의 타파, 조선인 자본을 위한 특수 금융 기관 설치, 관세 존치, 실업 교육 기관 완비, 동척 이민 폐지, 토지 겸병 금지, 조선인 생산 조합과 소비조합 등의 장려를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부산예월회의 요구 상항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의의와 평가]

부산예월회는 1920년대 전반기 부산 지역의 민족 자본가들이 결성한 사회단체로서 조선인의 교육과 산업 육성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