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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783
한자 辨天神社
영어의미역 Byeoncheon Shinto Temple
이칭/별칭 변재신사(辨才神社)
분야 종교/신종교,역사/전통 시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배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종교 시설|신사
설립 시기/일시 1678년 3월연표보기 - 설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63년 - 개보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82년 1월 - 개보수
최초 설립지 변천신사 -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정의]

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에 있었던 신사.

[설립 목적]

초량 왜관에서 조선과 일본 간의 무역에 종사하던 일본인들이 경제적 부의 축적을 기원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변천]

변천신사(辨天神社)[벤텐진자]는 변재신사(辨才神社)[벤자이진자]라고도 부르며, 1678년 3월 초량 왜관의 개관과 함께 설립되었다. 그 후 1763년 대관(代官) 귤자윤(橘滋胤)[타치시게타네]의 주관으로 개조하였고, 개항 직후인 1882년 1월에도 거류지총대사무소에서 독지가들 중 위원을 선정하여 개·보수하였다. 본래 독립된 신사였으나, 용두산 주위의 여러 신사들이 용두산 신사를 중심으로 통합되면서 1907년 무렵 ‘경내 신사’라는 부속 신사가 되었다. 용두산 신사의 우측에 위치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변천신사의 제신(祭神)은 제물의 신인 변재천(辨才天, 혹은 辨財天)[벤자이텐]으로, 엄도대신(嚴島大神)[이즈쿠시마다이진]이라고도 한다. 신체는 세 여인의 목상(木像)인데, 어느 날 남빈[현재의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에서 어부의 그물에 걸린 것을 왜관의 일본인들이 가져와 제사지내 온 것이라 한다. 이들 세 여신은 탐라국의 건국 설화에 나오는 세 신인[神人]과 결혼한 자들로, 부산에 거주한 일본인들은 이들을 일본 국왕이 보낸 것이라 하여 한일 간의 오랜 교류의 역사를 강조하였다.

[현황]

일제 강점기의 신사는 대개 해방과 동시에 철거되었는데, 변천신사 역시 같은 운명을 겪었다. 과거 변천신사용두산 신사가 위치했던 용두산은 공원으로 새로이 단장되어 옛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의의와 평가]

일본의 신도와 신사는 일찍이 불교, 유교와 같은 외래 종교와 습합 과정을 거치면서 일본인들 사이에 신앙적 성격을 지닌 종교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을 전후하여 천황제 근대 국가를 떠받치는 중요 이데올로기적 지주가 되었고, 본국을 넘어 국외 식민지에서까지 통합 이데올로기로 적극 활용되었다. 용두산의 신사들이 그 대표적인 예로서, 초량 왜관 시절에는 양국 간 무역에서의 경제적 성공, 항해의 안녕 등을 빌던 기복적 신앙의 형태를 띠었으나, 개항 전후 천황제 이데올로기 확산에 적합한 상징적 인물들로 그 제신이 바뀌어 갔다. 변천신사는 전자의 성격을 가진 신사로서 그 지역사적 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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