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1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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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百毛洋服店 |
영어의미역 | Baengmo Tailor Shop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대로29번길 10-1[동광동 2가 6-4]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류승훈 |
[정의]
1952년에 개업한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2가에 있는 수제 맞춤 양복점.
[건립 경위]
백모 양복점(百毛洋服店)은 함경도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던 김두헌[작고]이 6·25 전쟁 때에 부산에 피난을 내려와, 1952년에 광복동의 미화당 백화점[현 ABC 마트] 옆에서 최초로 문을 열었다. 백모 양복점의 ‘백모(百毛)’는 100%의 순모를 뜻하는 것으로 양복 제작 기술이 약했던 시기에 고급 천과 고급 양복을 지향하는 양복점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옛 미화당 백화점 주변은 부산의 최고 중심가로서 이곳에는 백모 양복점을 비롯하여 많은 양복점이 있었다. 당시에 백모 양복점의 영업은 활황을 누렸으며, 일하는 종업원이 18명이나 있었다.
[변천]
현 백모 양복점의 문종두 사장은 1960년대 초반부터 양복 만드는 일을 시작하였다. 과거 양복점에서는 풀무질을 하고 숯다리미를 사용하였으며, 손으로 천의 끝을 모두 감치는 등 고된 작업이 많았다. 3년 동안 견습생으로 일을 하면서 바지와 조끼를 만드는 법을 배우다가 5년이 지나면서 양복 상의를 제작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는 정식 기술자로 인정을 받으며, 상의를 한 벌 만들 때마다 일정한 돈을 받게 되었다. 재단사로 일을 배웠던 문 사장은 김두헌 사장으로부터 백모 양복점을 이어받아서 1979년 3월, 현 위치인 중구 동광동 2가로 이전하였다.
1990년대 들어 대기업이 기성복 사업을 시작하였고, 전국양복점협회에서 대기업의 진출에 큰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막지 못하였다. 이후로 기성복 시장이 확대되면서 맞춤 양복점을 찾는 손님이 크게 줄었다. 기성복의 유행은 한국인의 체형과도 관련이 있었다. 식생활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한국인의 체격이 좋아졌으며, 이에 따라 기성복을 입어도 옷맵시를 낼 수 있었다. 기성복이 양복 시장을 잠식함에 따라 백모 양복점을 비롯한 부산 동광동에 모여 있던 양복점들의 매출이 크게 줄어들었다. 2006년 3월에는 제37회 양복의 날 ‘금익장’을 수상하였다.
[구성]
건물의 1층 전체[42㎡]를 양복점으로 쓰고 있지만, 넓지 않은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점포는 특별한 공간 구분 없이 양쪽 벽에 전시용 양복과 판매 대기용 맞춤 양복이 걸려 있다. 가운데에 응접용 소파와 한쪽 구석에 손님을 위한 치수 재기[採寸, 채촌은 패션계에서 쓰이는 말로, 일본어에서 비롯된 말임] 공간이 있을 뿐, 대부분의 공간은 제본과 재단, 가봉과 재봉, 그리고 다림질을 위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황]
기성복의 여파로 매출이 감소하여 2012년 현재 백모 양복점에서 일하는 직원은 3명[1980년대 18명]에 불과하다. 그래도 전통 맞춤복을 고집하는 손님들은 꾸준히 백모 양복점을 찾고 있다. 수제 맞춤 양복은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주 고객은 회사의 사장과 이사 등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다. 또한 결혼식을 맞이하여 예복을 맞추기 위하여 백모 양복점을 찾는 젊은이들도 있다.